성검 마두르크.

현존하는 유일한 성검.

태양빛에 달궈 달빛에 식혀낸 그 칼날은 한번 베어 통나무를 자르고, 일곱 대사제의 축복을 받은 그 검자루는 잡기만 해도 모든 질병을 없앤다고 합니다. 

오래전, 대륙을 덮친 화이트 드래곤 마두르크의 목을 베어냈기에 붙은 이 검의 이름이 그 위광을 나타내죠.

선택받지 못한 자가 잡으면 온 몸의 기력이 빠져나가 세 번 휘두르기 전에 쓰러진다기에 현재는 왕가에서 보관중인 물건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같은 정도의 마력량을 띄는 물건을,

“……내 머리 말리는 데 썼다고?”
“……하루에 30분씩……?”
“그, 서, 선생님이라면 아실거에요! 사, 사, 상식적으로 드라이기를 누가, 코, 콘센트 없이 쓸 수 있어요!”

클레어는 여러가지로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성검으로 머리를 말려온 것 같은 느낌도 그렇지만, 그걸 태연하게 써온 시니아는 또 뭔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지야, 도대체 뭘 만든거니…….”

우물쭈물하던 예지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드라이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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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딱, 똑, 딱.

방 안의 시계바늘은 열심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슈팔트는 찻잔을 채우려고 주전자를 들었다가, 이미 텅 비어버린 것을 깨닫고는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하지만 전하.”
“클레어. 우린 오늘 결혼했어요. 생각할 일이라면 넘쳐 흐릅니다. 우리의 신혼을 골치아프게 시작하고 싶진 않아요.”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두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것도 더 많이 듣고 싶소. 지금의 당신도, 전생의 당신도.”
“……네, 전하.”

한창 달달한 분위기를 풍기던 두 부부는 우울하게 자신들을 보던 예지를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놓았습니다.

“그, 옷은 걱정말게. 내일까지 세탁해서 돌려줄테니.”
“아, 아뇨……안그러셔도…….”
“내가 미안해서 그러네. 아, 그렇지. 아예 내일 한번 방문을 하는 건 어떤가?”

클레어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방긋 웃으며 예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 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궁금하고.”
“아, 그, 저…….”

한참이나 망설이던 예지는 마지못한 듯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작디 작은 대답을 들은 클레어는 부드럽게 예지의 머리를 쓸어내렸습니다.

“그럼, 내일 마차를 보내줄게. 어디로 보내면 될까?”
“네? 어, 어……그러면 여기 공방으로…….”
“그럼 점심시간에 보낼게. 같이 점심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알았지?”
“어, 그, 그게……네…….”
“그럼, 시니아. 준비해줘라.”
“알겠습니다, 전하.”

자리에서 일어난 아슈팔트는 예지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습니다. 히이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예지에게서 흘렀지만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일어난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부디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겠어.”
“어, 네, 어……그, 어……겨, 결혼, 축하드려요……전하…….”

시뻘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가까이 있던 아슈팔트를 제외하면 듣지도 못했겠지요.

“……고맙네. 내 반드시 자네의 선생님은 행복하게 해줄테니 걱정말고.”
“네…….”

공방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떨어져 어두웠습니다. 그 사이 다른 직원들은 퇴근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방 역시 불이 여기저기 꺼진 것이 을씨년스러워 클레어는 겉옷을 추켜 올렸습니다.

“어두운 곳이니 바래다 주겠네.”
“아, 저는 저어기 기숙사에 살아서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예지를 클레어는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어, 서, 선생님…….”
“예지야. 꼭 내일 보자. 하고싶은 얘기가 정말 많아.”
“……네에…….”
“조심히 가고. 내일 보자!”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클레어와 아슈팔트 뒤로 시니아가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예지는 허겁지겁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마차에 올라타려는 클레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아봤습니다. 가는 모습을 보려던 듯 오도카니 서있던 예지는 흠칫, 몸을 세웠습니다.

“근데 예지야. 너 담배피니?”
“……아, 저, 그게에…….”
“몸에 안좋으니까 끊고!”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폴짝 마차에 올라타 아슈팔트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그 뒤로 올라탄 시니아가 문을 닫자마자 마차는 쌩 하고 달려나갔습니다.

마차의 흔들림을 온 몸으로 받자 피로감이 단숨에 몰려왔습니다. 아슈팔트와 시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어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하루에 이렇게까지 여러 일들을 겪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수없이도 일어났던 일이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는 꽤나 얌전히 지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식도 했고, 자신의 품평도 올라갔고. 무엇보다도 오래 전의 제자를 만났으니까요.

창문에 머리를 기대니 서늘한 바깥의 온도가 유리를 넘어 이마를 식혀주었습니다. 클레어는 눈을 감고 예지와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임예지.

딱히 특별할 것 이라고는 없는 아이였습니다. 내성적이라면 뭐, 내성적이었습니다. 친구들도 있고, 학교 성적도 평범했습니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노래듣는 걸 좋아하고, 가족들이랑 얘기는 많이 안하지만 사이는 좋아보였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여러 학생 중 하나. 딱 그 정도로 좋아했고, 딱 그 정도의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 일가족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죠.

어디 놀러간댔던가, 아니면 잠깐 외출이었던가. 가족끼리 외식하러 간 걸지도 모르죠.

장례식장에서는 울고있는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 친척들이 모여서 조의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윤주 역시 절을 하고, 꽃을 두었습니다. 

어색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의 죽음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던 나이였고, 그렇게 친하냐면 그건 또 아니니까요.

그러나 육개장을 한 숟가락 뜨는 순간 터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담당하던, 같이 저녁식사도 하던 아이가 하룻날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지의 꿈이 뭐였던가요? 좋아하는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을까요? 가고싶은 대학교는 어디였을까요? 그 아이의 책장에 무슨 책이 꽂혀있었죠? 

조금 더 자세히 알아둘걸. 하루만, 단 하루만 더 이야기 할걸.

그녀는 결국 육개장을 삼키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났습니다.

예지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윤주는 취직도 하고, 자취도 하며 평범하게 지냈습니다. 부모님과 여행도 가고, 친구들이랑 맥주 한 잔도 하고, 직장에선 혼나기도 하는 바쁜 일상속에 예지에 대한 기억은 차츰 사라져갔습니다.

퇴근 하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간단히 군것질 할 것을 찾던 윤주는 간편식품 코너에서 발을 멈췄습니다. 인스턴트 육개장을 보니 불현듯 예지 생각이 나던 날이었습니다. 기분이 괜히 착잡해져 육개장과 소주를 사서 집으로 가던 윤주는 그렇게, 자신의 제자와 같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클레어.”

어느덧 잠에서 깬 아슈팔트가 천천히 클레어의 어깨를 감싸안았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눈가를 손으로 훔쳤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아뇨, 그냥…….”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눈가를 닦아주었습니다. 마차 안의 공기때문에 발그레해진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니 아직 물기가 남은 탓에 촉촉함이 입술에 남았습니다.

“울지 마요, 내 사랑. 좋은 날이잖습니까.”
“……후훗, 네. 좋은 날이에요.”

클레어는 밝게 웃으며 아슈팔트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그는 그대로 클레어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습니다. 마치 아기를 달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클레어는 어쩐지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쩌면 19살이 아니라 9살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중, 아슈팔트의 손이 멈췄습니다.

“그러고보니 약속을 어겼군요.”

클레어는 얼굴을 슬쩍 들어 아슈팔트를 올려보았습니다. 그는 난처하단 듯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제 3 황녀전하 말입니다.”
“리리아요?”
“아까 결혼식 전에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드렸는데.”

클레어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슈팔트를 더욱 끌어 안았습니다.

“괜찮아요. 기뻐서 울었으니까.”
“……결혼생활에 겁먹었나 하고 무서웠습니다.”
“애시가 있고 시니아가 있는데 무서울 게 어딨어요.”

클레어는 아슈팔트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거칠지만 정돈된 흑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지럽혔습니다. 그것이 조금 부끄러워진 아슈팔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버릇될 것 같군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 했습니다. 아슈팔트는 세차게 고개를 돌리고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 모든걸 실눈뜨고 보던 시니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차마 일어났다고 얘기하지도 못한 채, 신혼부부의 달달한 기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언제 도착하려나.’

덜커덩, 덜커덩.

숨막힐 정도로 애정행각을 펼치는 신혼부부와, 숨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는 시녀를 싣고, 마차는 어둠속을 하염없이 달려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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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4

카테고리 없음 2023. 12. 21. 11:52

응접실에는 네명이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있었습니다. 아직도 적대적인 시선을 뿌리는 아슈팔트, 그런 그를 달래주고 있는 클레어와 시니아, 그리고 그 중심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예지.

예지는 펑퍼짐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가죽옷을 맨몸에 입어서인지 불편한 듯 몸을 자꾸 뒤척였습니다. 한참이나 그런 모습을 보던 아슈팔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세계의……지구? 란 곳인 거죠.”
“네. 저와 예지는 거기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리고……과외……? 가정교사……같은…….”
“고 1때……수학 선생님이셨어요.”
“고 1……? 처음 듣는 단어인데……. 그……당신은……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죠. 작년이니까 스물 일곱이에요.”
“그리고 그, 임 아가씨……?”
“이름으로 부르셔도…….”
“그래, 예지. 5년 전에, 교통? 사고로…….”
“네. 5년 전이랑 하나도 안바뀌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음……그럼 지금은 20살이겠네?”
“……네.”

가만히 설명을 듣던 아슈팔트는 테이블 위의 홍차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지는 그 모습에도 흠칫 놀란 듯 힉, 하는 숨소리를 내었습니다. 아슈팔트는 그런 애처로운 모습에 손을 거두었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예지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까는……미안하다. 내가 조금 정신이……어떻게 됐었나 보다.”
“네에……괜찮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예지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습니다. 아직도 겁에 질린 듯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슈팔트는 답답했는지 목의 단추를 몇 개 풀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조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어른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실망하셨나요……?”

클레어는 고개를 살며시 돌렸습니다. 그러나 아슈팔트는 그녀의 손을 꽈악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습니다.

“그럴 리 있습니까.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인걸.”
“애시…….”
“그래도 최소한 당신한테는 떳떳할 수 있겠군요. 10살이나 어린 신부라 얼마나 눈치를 받았는데요.”
“……당신도 참.”

그런 그들의 애정행각을 감격에 젖어 바라보던 시니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두 부부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테이블만 보던 예지가 다시금 움찔 하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아슈팔트는 황급히 클레어에게서 떨어지며 헛기침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사과하고 싶군.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말해도 좋네.”
“……아뇨, 딱히…….”
“아냐, 예지야.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봐. 선생님이 다 해줄게.”
“진짜로 없는데…….”
“걱정말고! 선생님 돈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슈팔트가 보기엔 도저히 18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듣고 있는 예지가 20살이란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구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꼭이다? 선생님이랑 약속한거야?”
“네에…….”

예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에 클레어는 빙긋 웃었습니다. 마치 확인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여전히 놓여있던 헤어 드라이어에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음. 헤어 드라이어를 만든 게 예지라고?”
“제, 제가 다 한건 아니고!”

허겁지겁 손을 휘젓던 예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그냥 조정만……원래는 과장님이…….”
“그래도 자네가 만든 것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네…….”

아슈팔트는 홍차에 다시 손을 뻗었습니다. 힉, 하는 예지의 숨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홍차잔을 집으니 완전히 식어버린 찻잔의 온도가 차가웠습니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서류뭉치를 테이블 위로 건넸습니다.

“헤어 드라이어의 개선점이네. 부디 자네가 읽어줬으면 좋겠군.”
“드라이기……그거, 혹시 사용해보셨나요?”
“네. 제가 매일 아침 마님의 머리 정돈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시니아가 부족해진 홍차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귀족끼리라면 발언할 기회가 없지만, 예지가 암만 봐도 작위를 가지진 않아보였습니다.

사실 그녀로서는 내심 예지를 깔보고 있기도 합니다. 어리버리한 모습도 그렇고, 예절도 뭣도 없는 그저 평민 나부랭이 아닌가요. 이래뵈도 시니아, 그녀는 나름 남작가의 차녀입니다.

그럼에도 시니아는 웃음을 띄었습니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의 오랜 지인이니 예의를 지켜야죠. 식어버린 예지의 찻잔에도 홍차를 따라주었습니다.

“덕분에 매일 아침 힘들지가 않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뇨, 아니에요……아, 고맙습니다.”

예지는 뜨거운 홍차를 받자마자 홀짝였습니다. 뜨거운지 인상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서류 뭉치를 집어 살펴봤습니다.

팔랑, 팔랑.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로 서류를 한참이나 보던 그녀는 그것을 무릎에 두고 헤어 드라이어를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뽀각, 하고 그것을 열었습니다.

안쪽에는 손톱만한 수정과 여러 기호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서류와 비교해가며 보던 예지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다시 한 번 헤어 드라이어를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헤어 드라이어를 위로 올려 무언가를 찾는 듯이 보였습니다.

서류도 뒤척여보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저기……마선은 어디있나요?”
“마선이요?”
“네……그, 아마 이 정도 되는 걸텐데…….”

예지는 손을 자신의 어깨만큼 벌렸습니다. 시니아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습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만.”
“……네?”

예지는 눈을 껌뻑껌뻑이더니 되물었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썼어요?”
“그, 여기에 이렇게 마력을 넣어서…….”

시니아는 헤어 드라이어의 수정부에 손을 대고는 마력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응접실 안에 희미한 푸른 빛이 퍼져나갔습니다. 후웅, 하는 바람소리가 헤어 드라이어에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렇게요.”

그 모습을 보던 예지는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왠지 그 모습이 머쓱해진 시니아는 흘려보내던 마력을 멈추고 헤어 드라이어를 내려놓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예지는 입가에서 침이 흐를 뻔 한 걸 닦았습니다.

“뭘, 뭇, 어, 왜, 어?”
“……저기……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시니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예지는 그 손을 뒤집어서 살펴봤습니다. 굳은살이 드문드문 박힌 손이 부끄러워 얼른 손을 빼내니 예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혹시 출마도기나……?”
“네……?”

잠시만요,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예지는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잠시후, 그녀는 몸뚱이만한 장치를 수레로 밀며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복잡한 장치였습니다. 여기저기에 스크롤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마석들이 무지개빛으로 빛나며, 빨갛고 파란 단추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었습니다.

예지는 거기서 검은 선으로 보이는 것을 헤어 드라이어에 연결하고는 빨간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아까와 같은 바람소리가 헤어 드라이어에서 들려왔습니다. 그것도 잠시, 곧 가져온 장치에서 요란한 빛과 소음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에 그 방에 있던 모두는 귀를 틀어막아야 했습니다.

“꺄아아악!”
“예지야! 예지야!”
“그만! 이게 무슨 소리야!”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아슈팔트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조차 묻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지는 인상을 조금 찡그릴 뿐, 한참이나 장치와 헤어 드라이어를 바라보다가 단추를 눌렀습니다. 장치는 한참이나 비명소리같은 소음을 내다가 멈췄습니다.

“이게 원래 쓰는 방법인데요…….”
“…….”

귀가 얼얼한 세 사람은 작은 예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혹시 집에……하네스……없으세요……?”
“하……? 뭐……?”
“어……민간 주택 건설법에 따르면 최소한……방마다 하나씩은 있으셔야되는데……근데, 최근에 나온 법이라서……없으실수도…….”

예지는 깃펜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개선 사항이 써진 서류의 뒷면에 그림 하나를 그렸습니다. 커다란 동그라미와 그 안에 작은 동그라미 두 개가 나란히 그려졌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세 사람에게 보여줬습니다.

“이런 건데요…….”
“……아니, 본 적 없다만.”

아슈팔트는 아직도 멍멍한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클레어, 아니, 윤주는 저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콘센트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습니다.

“저거, 어디서 본건데?”

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거, 그 엘리야에서 봤어요. 전하, 그 왕도에 커다란 장신구점 있잖아요?”
“아하, 예물을 맞췄던 곳 말이군.”

아슈팔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확실히 엄청난 곳이었지. 한밤중인데도 대낮처럼 환하고, 겨울철인데도 장작을 어찌나 떼웠는지 한여름처럼 후덥지근 했어. 내온 음료수에는 값비싼 얼음을 얼마나 넣었는지 이가 시려울 정도였고.”
“엘리야, 요…….”

예지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지만, 원체 표정이 어두운 터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아무튼……이걸 쓰려면, 그, 하네스 라는 곳에, 이걸 꽂아서 써야 되는데요…….”
“진짜로 콘센트였구나?” 
“콘……?”

알 수 없는 단어에 아슈팔트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오늘만 해도 도대체 얼마나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지는 건가요. 그러나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클레어는 빙긋 웃었습니다.

“내가 나중에 말해줄게요, 애시. 아무튼. 그게 있어야 이 헤어 드라이어가 동작을 하는건데. 그렇지?”
“네, 네. 근데, 그, 저…….”
“시니아입니다.”
“아, 네. 시니아 씨……? 님……? 은 그걸 맨손으로 사용하셔서…….”
“그거라면 나도 사용한 적이 있다만.”

아슈팔트는 오기 전에 자신이 사용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시니아와 마찬가지로 헤어 드라이어를 작동시켰습니다. 

“자, 이렇게.”
“……그, 전하……그렇게 막 쓰시면…….”

우물쭈물하며 예지가 말리려고 할 때, 헤어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바람이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응? 이, 이게 왜……?”
“어, 얼른 내려놔주세요, 전하……!”

아슈팔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있던 팔이 덜덜 떨리자 그는 그것을 탁자에 뿌리치듯 내려놓았습니다.

“괘, 괜찮으세요……?”
“애시, 괜찮아요?”
“전하! 세상에!”

픽 하고 그는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것을 받치듯 클레어가 두 손으로 어깨를 잡았고, 시니아가 손부채질을 해줬습니다.

“……아까는 잘만 됐는데……?”
“잠깐이라면 괜찮으실 수는 있어요……그리고 평소에 단련도 하셨고…….”

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헤어 드라이어를 집어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어, 이쪽에 보이시는 게 발열 마도에요. 그리고, 이쪽이 송풍 마석인데, 그리고 어……이게 보호 마력로고…….”
“……결론만 말해주게.” 

파랗게 된 안색으로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어깨에 기댄 채 손을 내저었습니다. 예지는 허겁지겁 손가락으로 접어가며 무언가를 암산하고는 말했습니다.

“어, 어, 마력 송출량은……성검이랑 비슷할거에요…….”

방 안에 침묵이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한 순간, 시니아에게로 향했습니다.

시니아는 두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된거죠…….”
“……그러게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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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3

카테고리 없음 2023. 12. 19. 16:42

드로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종종 있습니다. 혹시 상회에서 자신들을 시험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분들이요. 특히 상회를 꾸리는 분들이 더더욱 그러시죠.”

얼굴이 새빨개진 클레어를 변명해주듯 드로민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게다가 부인께서는 어린 나이시지 않습니까. 더욱 얕잡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죠. 의심하시는 게 당연한겁니다.”
“……미안하게 됐네. 내 괜한 의심을 했어.”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클레어에게 황급히 손사레를 치며 드로민은 웃었습니다.

“아닙니다, 부인. 정말 좋은 덕목이죠. 의심은 신뢰를 위한 첫걸음이니까요. 저희의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길 바랍니다.”
“미안하네. 결혼식의 피로가 남아있던 모양이야. 부인이 날카로웠던 것은 나도 사과하지.”
“아뇨, 아닙니다. 하하하, 자꾸 이러시면 제가 더 곤란합니다. 자, 다 왔으니 일 이야기를 하시지요. 저곳입니다.”

드로민이 웃으며 한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회반죽을 칠해 회색의 건물엔 이곳저곳 검댕이 묻어 얼룩져 보였습니다. 온갖 자재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모습이 더더욱 지저분해 보여 얼핏 보기엔 창고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검은색 옷을 입은 작은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마치 로브처럼 생긴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브라고 하기엔 짧고, 앞섬에 주머니가 달린 것이 굉장히 특이한 차림새였습니다. 추운 듯, 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빈민가 아이들 같았습니다.

바지 역시 창백한 푸른색에 두꺼운 재질로 보였습니다. 공사 인부들이 입는 천으로 만들어진 바지가 이곳저곳 찢어져 안감이 보여 낡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입에는 짧은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모락모락 뿌연 연기가 쉼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레어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까까지의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충격이었습니다.

네, 그것은 그녀가 전생에서 ‘후드티’라고 부르는 옷과 ‘청바지’라고 부르는 바지였으니까요.

그 여성은 드로민과 뒤의 셋을 보더니 부리나케 담배를 끄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피해 건물로 쏙 들어갔습니다.

“바, 방금 전에 그……! 방금! 그! 저기! 저기에 있던!”

클레어는 놀란 듯 손가락으로 방금 그곳을 가리켰습니다. 벌벌 떠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아슈팔트와 시니아가 당황하며 혹시 몰라 그녀를 받쳐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마님!”
“아는 사람입니까?! 진정해요!”
“……아니, 아니. 미안해요, 애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드로민은 안절부절하며 클레어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직원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데려올까요?”
“아니. 괜찮네. 내 자꾸 미안하네.”
“하지만, 마님…….”
“아냐.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내가 뭔가 좀…….”

거의 울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니아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클레어는 입술에 힘을 주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이세계인’이 또 있을 가능성을 염두해두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교계를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만 그래도 해외까지 손을 뻗은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국 내에서의 활동은 대부분 살펴봤을텐데. 

클레어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뇨, 잘못봤겠죠. 그런 복식이 흔하지 않을 뿐, 어딘가에선 있을 수도 있죠.

그리고 설령 이세계인이더라도 뭐 어떤가요. 진정이 되니 머리가 냉정해졌습니다. 네, 그저 동향사람일 뿐이죠.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냥 놀랐을 뿐입니다.

네. 그 뿐이죠.

클레어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미안하네. 아까 말대로 결혼식이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야. 괜찮으니 마저 들어가도록 하지.”



응접실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있었습니다. 시니아는 클레어의 뒤에 자리하고, 혹시나 싶어 클레어는 껴안을 수 있는 쿠션이 주어졌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헤어 드라이어가 나무상자에 얹혀졌습니다. 드로민은 작은 양피지를 꺼내 잉크병과 같이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헤어 드라이어 말이다만.”

아슈팔트는 헤어 드라이어를 보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주 잘 만들어졌네. 사용해보니 아주 훌륭한 성능이야.”
“그럼 공작님께서 사용하신겁니까?”
“아니지. 나야 수건으로 몇 번 털면 끝나지 않겠나.”

그리고는 클레어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따뜻한 것을 마신 덕인지 손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부인이 매일 아침 이용하고 있네. 그렇지, 시니아?”
“네! 덕분에 제가 많이 편해졌어요! 머리 말리는 데 2시간 씩 걸리던 게 30분이면 뽀송뽀송하게 마른다구요!”
“해서, 여기. 개선했으면 하는 걸 적어왔네.”

시니아는 가방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내 드로민에게 건넸습니다. 드로민은 안경을 끼고 서류를 살폈습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한참이나 양피지를 넘기고는,

“꽤나 세세하군요.”

하고는 안경을 벗었습니다.

“저희 연구원이랑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만……아까 그 직원이라서, 혹시 불편하시다면…….”
“꼭 부탁하네!”

테이블을 넘어설 기세로 소리친 클레어 때문에 드로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짓자 그제서야 클레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부탁하지. 조금 신경쓰이는 게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드로민이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가자 아슈팔트가 클레어의 손을 잡았습니다. 걱정하는 표정으로 손등을 쓸어주니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클레어, 괜찮은겁니까? 아까부터 왜 이렇게 쫓기는 것 같이 그래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오늘따라 좀…….”
“그 직원이 아는 사람이에요?”
“그게……그러니까…….”

우물쭈물하던 클레어는 시니아가 홍차를 건네주니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미지근해진 홍차가 속을 데우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제가 사실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요.”
“그게 무슨…….”
“여기서 말하기는 길어요. 오늘 꼭 말씀드릴게요. 걱정말아요. 아마 걱정하시는 일은 아닐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시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마, 마님! 그러면 설마……!”
“……가능성의 이야기야. 너도 이따가 같이 와주렴.”
“둘만 아는 이야기라니, 조금 섭섭하네요.”
“정말 미안해요. 자, 기분 풀어요.”

클레어가 웃으며 손을 도닥이니 베시시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응접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문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드로민 부장과 들어온 것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습니다. 검은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어색하다는 듯 어물쩡거리며 클레어의 앞에 섰습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엔 옅은 피곤함이 있었습니다. 검은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그것을 뒷목 근처에서 헐렁하게 묶은 게 꾸미는 데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예법에 익숙치 않은 듯, 구부정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습니다.

“임예지입니다. 임이 성입니다.”
“이 친구가 헤어 드라이어를 만든 직원입니다. 이름이 특이하죠? 동방에서 와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드로민은 클레어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아까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드로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클레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인……?”
“마님?”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다른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클레어는 허우적 거리듯이 예지에게 다가와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주물떡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붓, 저기…….”
“클레어! 이게 무슨!”

허겁지겁 일어난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어깨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예, 예, 예지……! 예지야! 예지, 예지에요! 예지라고! 예, 예, 예, 예, 예지가……! 예, 예지가!”
“네……전데여어…….”
“예지야아! 예지가, 예지야! 예지야아아!”

울부짖던 클레어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부리나케 그녀를 붙잡는 아슈팔트의 얼굴만이 기억에 남는 마지막이었습니다.


클레어는 눈을 천천히 떴습니다. 낯선 천장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니 후드득, 하고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누워서 울었던 모양입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자니 바깥이 유난히도 시끄러웠습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클레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방을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고성을 지르며 칼을 뽑아 든 아슈팔트와, 그에게 매달린 장정들과 시니아, 그리고 그 앞에서 벌벌 떨며 울고있는 예지가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누구냐고 물었잖느냐!”
“이, 이, 이, 임예지인데, 요……!”
“그거 말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빨리 설명 드리지 못해?! 이러다 진짜로 죽겠어!”
“아무, 아므, 힉, 것도, 히끅, 안, 했는데요……!”

난장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클레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쓰러진 본인의 탓이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죠.

때마침 시니아가 클레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 마님! 제발 도와주세요!”
“클레어?! 클레어!”

아슈팔트는 칼을 놓고는 장정들을 뿌리치고 클레어에게 달려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미안해요. 다들 진정하고. 정말로 미안해요.”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슈팔트의 눈을 보다가 예지에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예지는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잠시 후, 바지 밑으로 축축한 물웅덩이가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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