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로데니아의 삶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아, 클레어 씨는 김윤주 씨가 환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김윤주 씨는 이 세계에 환생한 대한민국에 거주했던 26살의 직장인이구요.

그녀가 자신이 환생했음을 깨달은 건 18살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네. 작년의 일이군요.

자다가 일어난 클레어는 대뜸, 자신의 전생이 김윤주이며 지금 자신이 판타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심심할때면 읽던 낭만넘치는 세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이 세상이 소위 말하는 이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클레어는 거울을 들여보았습니다. 유리로 된 거울 속에는 푸른 빛깔의 긴 머리를 가진 소녀가 있었습니다. 순하지도, 그렇다고 표독하지도 않은 눈꼬리. 물빛을 한 머리카락이 그녀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로데니아 공작가문의 외동딸이라는 지위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역시 클레어의 위상을 높인 건 바로 저 북부의 대공, 트로젠 왕국의 방패, 드래곤 슬레이어, 설원의 푸른 곰, 아슈팔트 프레드리와의 약혼이겠지요.

물론 아슈팔트에 대해 길게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조각같은 외모와 듬직한 어깨, 왕국 최고의 검술실력,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과 그의 충직한 신하들. 알 건 다 아실테죠? 

아슈팔트와 클레어의 첫만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특히 황제의 앞에서 올려붙인 귓방맹이는 지금까지도 화자되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니까요. 

비록 그게 오해에서 시작된 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가의 장녀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올린 싸대기는 훗날 아슈팔트 대공이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보다 뜨거웠고, 프로스트 베어의 발톱보다 날카로웠다’ 고 저서를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 뒤에 남긴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처음이다’ 는 수많은 연애소설에서 사용된 문구이기도 합니다.

그런 클레어와의 약혼소식이 무도회장마다 울려퍼진 귀싸대기 소리의 유행을 부른 것도 뭐, 사실입니다만.

클레어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오늘은 그 아슈팔트 대공과의 결혼식입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올려 묶고, 화장을 한껏 한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고왔습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번쩍이는 보석들이 눈부실 정도로요.

“아가씨, 왜 한숨을 쉬고 그러세요.”

클레어를 치장해주던 시녀, 시니아가 클레어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습니다. 물론 원래는 무례한 행동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녀의 온기가 필요했습니다. 클레어는 자신을 감싸안은 손을 덮었습니다.

“그냥, 실감이 잘 안나서.”
“저도 실감이 안나요. 그 개구쟁이 아가씨가 약혼이라니. 거기다가 상대도 상대잖아요?”
“네 덕분일까? 네가 거기서 케이크를 엎지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테니까.”
“아, 아가씨! 그건 얘기하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시니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일부러 연기하는 게 느껴지는 말투였습니다. 물론 클레어도, 그리고 시니아도 그걸 잘 알고 있죠. 그래도 둘이 같이 지낸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니까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까르륵 거리던 시니아는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습니다.

“10살이나 차이나는 남편인데.....조금 아가씨가 아까워요.”
“시니아, 내 원래 나이를 생각해야지. 어린 애들은 애같아서 싫어.”

네, 시니아는 클레어의 전생에 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상대죠. 그녀의 기억덕에 이런저런 이득도 제일 많이 보고 있구요. 예를 들어 보습제라던가, 화장품이라던가.

“아가씨.....”
“자, 그만 투덜거리고. 오늘 할 일이 많잖니?”

그렇게 말하며 클레어는 화장대 옆에 놓인 기괴한 물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참조해 만든 물건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헤어 드라이어’라는 겁니다. 헤어 드라이어가 공용화되면 다른 여성들의 치장시간이 반은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녀는 오늘, 이것을 상회에 팔 생각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돈 걱정은 안해도 될거야!”
“확실히 이 헤어 드라이어라는 거, 너무 편하니까요!”
“흐흐흐. 드디어 돈방석에 앉아 유유자적한 삶을 살 수 있어....!”
“아가씨, 아가씨. 저 잊지 않는다고 한 약속, 기억하시죠?”
“그럼! 너는 내 연구자문으로 평생 놀고 먹게 해줄게!”

기운차게 대답하는 클레어의 뒤로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니아가 문을 살짝 열어 방문객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가씨, 리리아 트로젠 제 3 황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붉은 머리를 한 인형과도 같은 소녀였습니다. 나이는 17이나 먹었을까요. 어딘가 앳된 모습이 남아있었습니다. 머리 위에는 작은 티아라를 올린 그녀는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클레어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트로젠 왕국의 제 3 황녀님을 뵙습니다.”

클레어가 인사를 하던말던 리리아는 으르렁거리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흥!”

하고는 고개를 팩 돌렸습니다.

“어디서 감히 내 사람을 채가는 주제에...”
“황녀전하.....”

그리고는 성큼성큼 클레어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주었습니다.

“날도 추운데 어깨는 다 드러내고! 난로는 코딱지만큼 피워놓고! 옷은 이렇게 얇고! 머리엔 무겁게 보석이 잔뜩! 코르셋은 대체 얼마나 조여둔거야! 우리 언니 숨은 쉬어지는거야?!”

그리고는 와락, 클레어의 품에 안겼습니다. 클레어는 천천히 리리아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전하, 머리 망가져요.”
“그런 거 몰라.”

난처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클레어는 시니아를 향해 손짓을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이해했는지, 시니아는 문을 조용히 닫고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을 들었는지, 리리아는 더욱 품을 파고 들었습니다. 코르셋으로 한껏 조여진 배가 눌리는 압박감이 힘들지만, 클레어는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나 부비적 거리던 리리아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꼭 행복해야돼, 언니?”
“물론이죠. 이렇게 사랑하는 전하도 계신걸요.”
“……내가 받은 건 돌려주지도 못했는데.”
“전하께서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시는 모습만 봐도 제가 받은 게 더 많은걸요?”

리리아는 헤죽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입술이 삐죽 내밀며,

“이런 착한 사람이 그런 곰같은 녀석한테 시집가는 게 이해가 안가.”
“곰같은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그 말에 둘은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훤칠한 남성이 문가에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부진 어깨와 터터질듯한 가슴팍의 셔츠가 단련된 그 아래의 근육을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달린 훈장들이 아무리 빛을 발해도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의 미혹에는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슈팔트 프레드리, 푸른 곰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로 클레어의 남편이 될 사람이죠.

“그래도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그 품은 저만의 것이라서 말입니다.”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습니다. 그에 물러나듯이 리리아는 더욱 깊이 클레어의 품에 껴안겼습니다.

“결혼식날 신랑이 신부를 보러 오는 건 안좋다고 들었는데, 아슈팔트 프레드리 대공?”
“결혼식을 질투하는 악령이라면 걱정마십시오. 방금 물리치고 온 참입니다. 시니아란 악령인데, 문 앞에서 들어오면 안된다고 하소연 하길래 애 좀 먹었죠. 마침 여기도 한 분 계시군요.”

능글맞게 웃으며 아슈팔트는 리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3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까는 악령이라더니요?”

피식 웃으며 대신 답한 클레어가 리리아를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아슈팔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히죽 웃으며 리리아를 바라봤습니다. 리리아는 건방진 표정을 지었습니다.

“황족을 악령이라 멸칭한 죄, 이는 중대한 죄이다. 나는 이것을 좌시하지......”
“대기실에 커스터드 슈크림을 준비했습니다만.”

리리아는 잠시 눈을 데록 굴리고는 침을 꼴딱 삼켰습니다. 그러나 이내 더욱 목에 힘을 줬습니다.

“황족에게 감히 뇌물을...”
“사이다도 준비했습니다. 그걸로 방금 전 악령을 물리쳤죠.”
“그럼 묵비하도록 하지.”

키득키득 웃으며 리리아는 클레어의 품에서 벗어나 아슈팔트의 앞에 섰습니다. 아슈팔트의 키가 워낙에 큰 나머지 무릎을 꿇은 채로도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습니다.

리리아는 아까까지 짓던 웃음기를 지웠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황족의 품격을 갖춘 리리아를 본 아슈팔트 역시 웃음을 지우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습니다.

“아슈팔트 프레드리 공작. 리리아 트로젠 제 3 황녀의 명을 받으라.”
“아슈팔트 프레드리,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슈팔트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리리아에게 내밀었습니다. 자신의 손은 지금부터 명령권자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리리아는 내밀어진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습니다. 

“우리 언니, 잘 부탁해요.”
“황명을 받겠습니다.”
“언제나 웃게 해줘요.”
“황명을 받겠습니다.”
“내 몫까지 사랑해주고.”
“황명을 받겠습니다.”

리리아는 손을 거뒀습니다. 아슈팔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우리 언니 눈에서 눈물나면 가만 안둬요!”
“황명을 기쁘게 받겠습니다.”

히죽 웃으며 방을 나간 리리아를 시니아가 안내했습니다. 그걸 본 아슈팔트는 클레어에게 걸어와 가볍게 입을 맞췄습니다.

“미안합니다. 혹시 둘을 방해했습니까?”
“조금요?”

키득키득 웃는 그녀를 보며 당혹감을 보이던 아슈팔트는 화장대 위로 시선을 보였습니다.

“꼭 오늘 가야겠습니까? 피곤할텐데 다음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의 시선을 따라 헤어 드라이어를 본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괜찮아요. 오늘 이목이 가장 집중될텐데, 선전하기 좋은 날이죠.”
“무리하지 않는 게....”
“애시.”

다정하게 남편의 애칭을 부른 클레어는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날 믿어요.”
“....힘들면 바로 돌아오는겁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오고 문 밖에서 집사가 소리쳤습니다.

“대공전하, 그리고 아가씨. 입장 준비 해주십시오.”

아슈팔트는 클레어를 보며 미소지었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부인?”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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