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마님!”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회의실 문을 여니 아슈팔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뒤에 서 있던 시니아 역시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미안해요. 잠깐 자리를 비웠네요.”
클레어는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뒤에 서있던 예지는 문을 닫고 한쪽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남자들의 예의였기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 했습니다. 오직 드로민만이 조용히 헛기침을 할 뿐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프레드리 전하. 이예지입니다. ‘이’ 가 성입니다.”
“그래, 자네가 내 아내를 따로 보자고 했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애시, 괜찮아요. 그냥 헤어 드라이어에 대한 걸 묻고싶었던 것 뿐이에요.”
클레어가 다가와 그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도 아니었으니, 아슈팔트 역시 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어나게, 예지라 했나?”
“네, 전하.”
특이한 이름이군, 하며 아슈팔트는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태연하게 자리에 앉는 예지를 보며 그는 턱을 괴며 웃었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날 보면 겁부터 먹던데, 자네는 그렇지 않군.”
“……네, 뭐…….”
“대답해 봐. 북부의 푸른 곰이 무섭진 않나?”
피식 웃으며 도발하는 걸 보며 클레어와 시니아는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암만 그가 마음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뭐 하나 수틀리면 삐딱하게 나오는 건 여전했습니다. 아무래도 클레어를 단독으로 대면한 것이 영 기분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예지는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만 긁적였습니다.
“그래도 북부의 방패이신 프레드리 전하를, 그 비호의 아래에 있는 제가 무서워 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허.”
뻔뻔하달까요, 아니면 간이 튀어나왔다고 할까요. 정곡이라면 또 정곡이죠.
그쵸. 북부의 몬스터들을 막고 있는 전선의 군인인 자신과, 그 덕에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그녀. 감사할지언정 두려워 할 이유는 못됩니다.
한 방 먹은 듯 한 아슈팔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금 물었습니다.
“그 말 그대로라면 황제폐하도 두렵지 않겠군, 그래?”
“아, 폐하께서는 혹시 무서우신 분인가요?”
“…….”
“아직 못뵈서…….”
천연덕스러운 예지의 모습에 아슈팔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려버렸습니다. 클레어 역시 황급하게 부채를 꺼내 입가를 가렸습니다. 시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았습니다. 드로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예지의 앞에 홍차를 채워주었습니다.
“그, 이 친구한테 그런 걸 바라시면 안됩니다. 아주 말로는 이길 재간이 없는 녀석입니다.”
“푸하핫, 아, 정말 멋진 대답이었어. 그렇고 말고. 무서워 할 필요가 없지. 그렇고 말고! 하하하!”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던 아슈팔트는 눈가를 닦으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내 사과하겠네. 너무 유치하게 굴었어. 시험하려 한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괜찮습니다. 덕분에 즐거우셨다면 다행이죠.”
클레어는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며 얼굴을 식혔습니다. 저렇게 뻔뻔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녀는 예지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습니다.
“집에 가면 내가 혼낼테니 너무 신경쓰지 말게.”
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홍차를 마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시험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그새 또 뭘 시험당한걸까요? 귀족들이란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바탕 웃음이 휩쓸고 간 뒤, 클레어는 시니아를 통해 헤어 드라이어를 꺼냈습니다. 그걸 보며 예지와 드로민은 양피지와 잉크를 꺼냈습니다.
“자, 그래서 이걸 이제 좀 팔아보려고 하는데.”
“써보셨나요? 나름 자신있게 만든건데, 어떠셨습니까?”
“아주 좋았어요!”
시니아는 미소를 지으며 헤어 드라이어를 쓰다듬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연인의 반지를 쓰다듬는듯 한, 사랑스러운 손길이었습니다.
“이젠 이 아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에헤헤…….”
“……잘 쓰고 계셔서 다행이네요. 저도 한 세트 더 만들어서 쓰고 싶을 정도에요.”
“그쵸! 정말 아가씨는 천재에요! 이런 걸 떠올리시다니!”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니아를 애써 무시하며 클레어는 종이뭉치를 예지에게 건넸습니다.
“음, 그래서 이게 추가적으로 개선했으면 하는 사항일세.”
“개선이라니요! 이보다 완벽한 건 존재하지 않아요!”
“우선 이 부분쯤에 풍량을 조절할 수 있는 버튼이 있으면 좋겠어. 여기, 이쪽 손잡이 부분일세.”
“그런 것 없이도 훌륭하답니다!”
“그리고 이 앞에 바람이 나오는, 송풍구 쪽을 얇게 하거나 하면 머리 모양을 바꾸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아가씨, 아니 마님의 머리는 어떻게 해도 아름다우세요!”
“……이 부분을 끼워서 교체하면 꽤 좋을 것 같은데.”
“네, 확실히 그렇군요. 검토하겠습…….”
“교체 할 부분은 한 곳도 없어요! 그저 완벽하다구요!”
“시니아…….”
“네, 마님!!”
시니아는 신나서 춤이라도 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려있는 것을 깨닫은 그녀는 웃음기를 지웠습니다. 예지는 그런 시니아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좋아해주셔서 다행이네요.”
“……네…….”
“……미안하네.”
클레어가 시니아를 째릿, 쳐다봤습니다.
“만든 보람이 있네요.”
“……진짜로, 미안하네.”
예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는 시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시니아가 흠칫 놀랄 정도로 공손한 태도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써주시니 제가 더 기쁘네요.”
“……그, 너무 좋아서…….”
예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아마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게 이제서야 생각난 탓이겠지요.
드로민과 예지는 작성한 내용들을 보며 서로 몇마디를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드로민은 홍차를 한입에 털어넣고는 아슈팔트와 클레어에게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럼, 헤어 드라이어 수정건에 대해서는 저희가 추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음, 잘 부탁하지. 아낌없이 지원할테니 언제든 연락하게.”
아슈팔트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에 뒤이어 클레어가, 그리고 드로민과 예지가 일어났습니다. 문득, 아슈팔트가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러고보니 이 헤어 드라이어는…….”
“가져가셔도 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개선품과 교체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예지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시니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겼습니다. 그것을 보며 웃음을 짓던 예지가 문득 물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마선 길이는 괜찮으셨나요?”
예지의 물음에 드로민은 이마를 탁, 쳤습니다.
“이런. 그거 꼭 얘기한다고 아침에도 말했었는데.”
“제가 안적어놓았네요. 저도 방금 생각났어요. 아하하…….”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다시 양피지를 펼쳤습니다.
“그, 지금 길이가 1갈린이니까…….”
“아침에 말씀하신 건 2갈린이었습니다.”
“2갈린짜리 마선을 보여드리는 게 낫겠어. 직접 사용하시면서 원하는 길이를 말씀해주시는게. 아, 아니다. 그냥 오늘 교체까지 해드리고, 재단은 바로 가능한가?”
“네. 50린 단위로는 재단 해두었습니다.”
“그럼 우선 3갈린까지 가져와보고, 직접 사용해보시고 가져가실 수 있게 해드리지. 여기 마선구는 있나?”
“테이블 아래쪽, 부장님 뒤에, 네.”
“조금 짧으니까 다선구도 가져오고.”
“네.”
“저, 이보게.”
“네, 대공 전하?”
아슈팔트와 클레어, 그리고 시니아는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습니다. 방금 막 회의실을 나가려던 예지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추며 뒤로 돌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 한참을 보던 그들 중, 결국 클레어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마……그게……뭔가?”
“……네?”
“뭐가……뭐, 다시 앉아야 하는건가?”
“어, 네……앉아서 기다리시면 금방 준비를…….”
“아니, 그러니까. 고마워요, 애시. 어, 뭘 준비하는 건가?”
“그러니까, 마선을…….”
“그러니까?”
“네?”
“그 마선……이라는 게 뭐냐는 말일세.”
“그……헤어 드라이어 쓰실 때 쓰는 그 선입니다만……?”
“선?”
“네?”
“무슨 선?”
“그러니까, 그, 여기에 이렇게 꽂히는…….”
“꽂힌다고?”
“그, 안가져오신 그 까만…….”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어, 그래, 드린 거랑 같은 것도…….”
“그러니까, 선이 있었다고?”
“네. 그, 이만한 길이에 검정색입니다만.”
“어?”
“시니아? 본 적 있어?”
시니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덜덜 떨며 물었습니다. 삐걱, 삐걱 거리며 클레어를 바라보는 눈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듯이 물기가 가득했습니다.
“……선물할 때 쓰는 포장용 끈……아니었어요……?”
“네? 네, 뭐 그거같습니다만.”
“그거……버렸는데…….”
“네……?”
드로민이 눈을 껌뻑, 껌뻑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습니다.
“……썼다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