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문피아,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하시는 밀렘 님의 '그 드라마의 15화'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15화'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누구도 기억을 되찾길 바라지 않았어요."

 

내가 진정이 되고 나서 그가 맨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말인 즉슨 요운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그 세계'가 무너지던 그 날, 요운은 자신의 대가로 우투리의 기록을 넘겼다. 요운이 우투리로 각성한 것은 불과 몇 달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영웅이란 기록은 요운의 혼이 넘어오기에는 충분한 대가였다. 그렇기에 요운은 기억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오늘'이 대가로 바친 것은 여의주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을 여는 열쇠로서 사용됐기 때문에 혼이 넘어오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오늘'은 기억을 잃은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꿈속에서나 본 듯한, 아련한 기억만이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오늘은 '그 세계', 빌더쓰의 세계를 쌓아올린 작가였다. 그 특수함이 손요운에게 시즌 2, 어쩌면 '오늘'이 겪었던 일을 말하면서 기억이 돌아오고 만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죠."
"그, 그러면……. 구, 구, 국장님 역시 기, 억을……?"
"아뇨. 여의주란 그 용의 흔적이니까요. 그것을 바치신 국장님……. 청룡님 역시 기억이 없으셨어요. 저와 오늘 씨 뿐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말이죠."

 

어쩌면 한명 더 있을 지도 모르죠, 라며 요운은 히죽 웃었다. 나 역시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늘 위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마 나와 요운의 눈에만 보이는 눈일 것이다. 세계가 깨지면서 그 틈새로 불어오는 눈이 불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견고한 세계는 자기 스스로 수복될 것이다.

인간 몇이 세상을 뒤틀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무너뜨릴 수도, 무너져가는 세상을 다잡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곳에서의 기억을 잊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잊지 않는 것이 맞는지.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가족을 잃은 고통을 다시 떠올리는 것 보다는 낫겠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그 기억들을……. 추억들을 잊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요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영웅이었던 요운은 이제와선 꿈속의 존재들까지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요운은 모든 것을 안으려 했다. 그 모든 업을 지고서도 말이다.

 

"저, 저는……. 그런, 건 잘……. 모, 모르겠어요……."

 

한편 나는.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요운처럼 모든 인간을 짊어질, 서원처럼 모든 업을 짊어질, 그 어떤 각오도 하지 않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저 부모님을 다시 한 번 보고싶었을 뿐인,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그래, 다른 모든 사람들 처럼 말이다.

 

"그, 그래도……. 아무, 도, 믿어주지 않을, 거, 거에요……."
"……그러게요. 드라마의 세계가 실제로 있다고 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 그, 그러니까……. 그냥, 두, 두, 두죠……."
"……하지만, 제게는 그 세계의 사람들을 짊어질 책임이……."
"어, 없어, 요……. 요운, 씨는 이, 이제……. 우투, 리, 가 아니니까……."

 

그래, 다른 모든 사람들 처럼 말이다. 요운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저 배우일 뿐이다. 나와 같은 이기적인 사람이고, 모든 인간을 짊어질 필요도 없으며, 모든 업을 짊어질 필요도 없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니까.

 

"아, 아직도……. 자, 자기 자신이, 여, 여, 영웅인 줄 아시는 건가요……?"

 

요운은 나의 말을 듣고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결국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 자만이었군요. 전 더 이상……. 우투리가 아니니까요."

 

* * *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며칠 간 말더듬이가 계속됐다. 단번에 '오늘'의 기억이 돌아온 탓일 것이다. 회사와 부모님에게는 드라마 시즌 2 때문에 긴장해서 그렇다며 웃어넘겼지만 말이다. 속아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지만,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부장님만 빼고.

 

시나리오 작업은 단숨에 이어졌다. 주인공을 정해준으로 내세우고 나니 이야기는 단숨에 풀어져 나갔고, 부장님은 물론 국장님 역시 흡족해 하셨다.
국장님께 시놉시스를 보여드릴 때는 솔직히 긴장했지만, 기억이 돌아온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빌더쓰 인터뷰가 방영되는 날.
나와 부모님은 TV 앞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방송을 봤다. 특집으로 된 인터뷰는 우선 내가 했던 인터뷰가 나오고, 손요운과 박서원을 게스트로 한 패널쇼가 진행되었다.

……내가 한 인터뷰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엄마가 내 등을 두드리며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냐고 핀잔을 줬다고만 하고 싶다. 시즌 2에 대한 것은 손요운과 박서원이 말하는 게 더 임팩트가 큰지 편집되었다. 사실 내가 한 말의 절반정도는 편집되어 결국 내가 한 것은 캐릭터들에 대한 짤막한 설명 뿐이었다.

 

[시즌 2 나오는 거 확정되었나요?]
[그게 얘기가 좀 복잡한데.]
[아니, 도대체 안 복잡한 이야기가 있긴 한가요?]

 

방청객들이 MC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빌더쓰가 캐스팅으로 말이 많았잖아요?]
[제작비 캐스팅한다고 다 날려 먹었나 이야기가 많았죠.]
[그으렇죠. 아무래도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배우만 유명할까. 우투리에, 청룡에, 이무기까지 다 등장하는 마당에.

 

[아, 혹시 그 분들이 계약을 시즌 하나만……?]
[그건 아니고요. 빌더쓰에 나왔던 배우님들은 만약 후속 시리즈가 만들어진다면 그대로 출연하신답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럼 뭐가 복잡한 이야기인가요?]
[국장님이.]
[국장님이?]
[예전에 은퇴하셨잖아요.]
[그쵸. 저 그분 팬이었는데 일찍 은퇴하셔서 너무 아쉬웟어요. 이번에 짧게나마 복귀하셨었죠? 진짜 좋았어요.]

 

자료화면으로 슬쩍 지나가는 선비 한 명이 보였다. 국장님이었다.

 

[국장님이 은퇴한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 막둥이가 태어났대요.]
[……막둥이요?]
[네. 육아한다고 그냥 배우 일 접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하.]
[그런데 국장님이 출연하셨던 드라마나 영화가 너무 옛날 거다 보니까, 막내가 아빠가 배우라는 걸 안믿는다고.]

 

이 세계에서나 그쪽 세계에서나 아들내미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아버지였다.

 

[아, 그래서!]
[네, 그래서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신 건데요.]
[그런데 막상 드라마에 아빠가 나오는 걸 보더니 막내가 엄청 싫어했대요.]
[아니, 왜요? 국장님 되게 멋지게 나오시던데.]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아빠 얼굴 보니까 깬다고.]
[……음. 이해가 되네요. 막내가 몇 살인데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랬던가.]
[아이고, 어리네요.]

 

어리다니. 그럼 지금까지 팀장을 초등학교 4학년 짜리 꼬맹이로 둔 나는 뭐가 되는걸까.

 

[혹시 그래서 드라마 다음 시즌 컨펌이……?]
[에이, 국장님이 그렇게 속 좁으신 분은 아니죠. 아니겠죠. 아들 반응에 상처는 좀 받은 것 같은데, 그게 이유는 아니고요.]
[그럼요?]
[복잡한 이유라고 하더니 아예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시고 계시네.]

 

서원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복잡한 이야기였음을.

국장님의 분량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박서원, 손요운 등의 최고의 인기 캐릭터들은 물론 구민석을 사랑하는 아줌마 팬들까지 사로잡기 위한 시나리오를 16부작 내로 서술하라는 문제의 정답이 국장님을 청룡으로, 박서원과 손요운을 조연으로, 심지어 구민석을 가끔가다 등장하는 회장으로 등장시키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만약 이게 잘못되면 다시 한번 시청자 게시판은 내 이름으로 도배될 것임을.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이번엔 진짜 얘기해 드릴게요.]
[진짜죠?]
[사실 컨펌 났어요.]

 

패널들과 방청객들 사이에선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자막과 CG로는 화려한 팡파레와 꽃가루들이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원은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다음 달부터 촬영 들어가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욕을 했던 그 캐릭터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박서원 씨가 연기한 박제영이 언제부터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있었는지!]
[손요운 씨, 그러면 되게 나쁜 놈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아, 하긴 나쁜 놈은 아니었죠. 마지막에 뒤통수 맞은 호구라면 모를까.]
[이러기에요?]
[이러깁니다.]

 

요운과 서원은 웃음기를 띄며 투닥거렸다. 어깨를 툭툭 치는 그 둘 사이에는 마치 친한 형제같은 연이 보이기도 했다. 요운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치 거짓말 처럼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엄마가 잘자라는 인사를 건넸고, 나 역시 그것에 대답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매만졌다. 엄지손가락의 끝은 통화버튼을 맴돌았고, 결국 그것을 눌렀다. 새하얀 바탕에는 10개의 숫자버튼과 별모양, 그리고 샾모양의 버튼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은 그 세계에서 벗어나기 전에 한 가지를 기도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기도가 아닌, 나에게 하는 기도였다. 사실상 기도라기 보다는 기원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늘'은 벽 하나를 삼켰다. 손바닥에 정자로 꾹꾹 눌러써 벽을 썼고, 그것을 삼켜 마음 속, 혼의 한 곳에 커다란 벽을 세운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한 눈에 보기만 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벽을 말이다.

하지만 그 벽은 다른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벽이었다. 그것은 벽이라기 보다는 담벼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담벼락의 위에 열한자리의 숫자를 적었다.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 수도 없이 써넣어 삼킨 숫자들을 새겨넣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옆에도 적고, 그리고 그 밑에도 적었다. 담벼락이 한가득 찰 때까지 말이다. 마치 낙서라도 하듯이 빼곡한, 그리고 유치한 어린아이의 기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을 믿었다. 그 담벼락의 낙서가 영원토록 남기를.

 

그리고, 나는, 그 담벼락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러자 숫자 하나하나에 깃들은 추억들이 느껴졌다. 아팠던 기억, 괴로웠던 기억, 웃었던 기억, 울었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 무서웠던 기억……. 그 모든것들이 거품처럼 떠올랐다가, 거품처럼 사그라졌다.

핸드폰의 버튼 하나를 누를 때 마다 추억들이 떠올랐다. 일하며 부대꼈던 사람들이, 일하며 만났던 저주들이, 그리고 그 저주에 담겨있는 슬픔이, 과거의 유물들에 담겨있는 한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의 모든것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녀의 추억들이, 기억들이, 하나씩 사그라졌고, 이윽고 내게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리움만이 남아, 나를 맴돌았다.

 

그녀는 그렇게,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담벼락 위에 다소곳이 올라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담벼락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 담벼락 위에 올라앉았다.

 

그렇게, '나'는 그리움을 그리워했다.

 

핸드폰 화면에는 열한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혹시 늦은 이 시간에 폐가 되지는 않을까. 혹시 잘못 누르지는 않았을까. 혹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망설임은 짧았고, 내 엄지손가락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

영원과도 같은 짧은 순간이 지났고, 핸드폰의 너머에선 숨소리가 들려왔다.

 

"……."
"……."

 

고요한 침묵이 익숙하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그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해준 씨, 인가요……?"

 

긴가민가했다. 그가 날 기억해줄까? 날 그리워해줄까? 말을 더듬지 않는 내가 이상하진 않을까?
한참 뒤에서야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 그. 생일 선물, 늦었는데."
"아."

 

연말연초라 바쁠지도 모른다. 다음달 부터는 촬영이 들어가니 각본작업에 또 다시 철야로 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 것이다. 무려 9월부터 있었던 약속이니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가운데에서, 그가 내게 물었다.

 

"받고 싶은 거 생각해 놨어요?"

 

Posted by Bule
,

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문피아,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하시는 밀렘 님의 '그 드라마의 15화'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15화'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반갑습니다, 오늘 작가님. 잘 부탁드려요."
"네. 잘 부탁드려요……."

 

인터뷰를 위해 회의실로 가니 이미 인터뷰 준비가 끝나있었다. 여기저기에 설치된 조명판과 카메라, 그 한가운데에 있는 새하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이는 김성훈 기자. 그리고 인터뷰 전에 코디네이터의 손에 이끌려서 마구잡이로 정리된 머리와 옷까지.
어색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사무실 사람들은 날 보고는 입을 떠억 벌렸다. 사진 찍지 마요, 부장님.

 

"그러면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네, 그……. BUILD THE EARTH의 시나리오 작가인 오늘입니다……."
"빌드 더 어스. 줄여서 빌더쓰로 불리고 있는데요. 우선 이것부터 여쭤봐야겠죠. 마지막화 방영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사람들의 반응이라. 김성훈 기자님, 당신도 우리 회사 직원이면 알텐데요.

 

"뭐…….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어요……. 시청자 게시판에서 제 이름이 나오지 않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요……."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요."
"그래도 그만큼 빌더쓰를 사랑해주셨다는 거니까요……. 그래도 심한 욕은 안해주셨으면 하는데……."

 

약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 대해 법적조치를 취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개중 일부는 이미 법무팀이 고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네, 드라마를 사랑해주시는 것도 좋지만, 작가님 역시 사람이란 점, 그리고 상처받는다는 점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자, 그럼 화제를 바꿔서.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말해볼까 해요. 먼저 주인공인 손성우. 인간의 영웅인 우투리에 대해서."

 

손성우. 무지개빛 날개를 지닌 인간의 영웅. 그리고 우리 촌스러운 이름의 주인공.
처음에는 이런저런 영웅들이 무작위로 선별됐지만, 부장님이 '야, 우투리! 이름 웃기네!'라 하면서 우투리가 됐다.

 

"손성우는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특히 우투리라 그러면 조금 촌스럽다는 이야기도 있었구요……. 그, 발음이……."
"확실히 그렇죠. 그래도 그런 반응은 쏙 빠졌죠? 진짜 멋지게 등장했잖아요. 솔직히 날개라 그러면 촌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멋졌잖아요."
"아, 날개요……."

 

'작가님, 날개요? 무지개 날개요? 진짜 이대로 가요?'
'저는 말렸는데……. 부장님이…….'
'아아아아악!!!! 개부장!!!!!'

 

난 정말로 말렸다. 그러니 그런 눈 하지 마요, 편집팀 여러분. 내 탓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야근은 부장님 탓이에요.

 

"중국의 손손TV랑 컨텍이 되면서 그쪽 자본을 많이 받은 덕이죠……. 내년 3월부터 단독으로 중국에도 방영되니까요……."
"중국 쪽에서도 이미 광고가 나가고 있죠? 사람들의 반응이 정말 좋던데요! 네티즌들은 벌써 성우 캐스팅을 예측하고 있는데, 오늘 작가님도 보셨나요?"
"네. 정말 쟁쟁한 분들만 올라오더라구요……."

 

응, 정말이다. 그 중에는 할리우드 배우도 있고. 무서운 점은 정말 캐스팅 할 것 같다는 거지.

 

"자, 다음으로 박제영! 박서원 씨가 너무 잘 연기해주셨죠? 그리고 마지막에 뒤통수를 당한 호구 악역이죠."
"아하하……."

 

그리고 내가 욕을 먹고 있는 이유지.

 

"마지막에 그렇게 끝내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음……. 박제영의 업이라고나 할까요……. 나쁜 놈이니까 말이죠…….
"그렇다고 해도 말이죠.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구요?"
"이건 비밀인데……."
"응? 뭔데요?"
"빌더쓰, 시즌 2가 준비되면서 말이죠……."
"시즌 2요?!"

 

기자님. 티나요. 알고 있었잖아요. 그럼에도 성훈은 촬영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부담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와! 시즌 2! 그걸 위한 포석이었군요? 어쩐지 너무 떡밥들이 안풀린다 했다구요!"
"아직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말이죠……."
"좋네요, 시즌 2. 좋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박제영에 대해서 더 여쭤보고 싶은데요……."

 

* * *

 

"자, 시즌 2를 위하여!"
"위하여!"

 

거칠게 유리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빌더쓰 시즌 1의 모든 마무리가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부장님이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회사 앞 소곱창집에서 회식이 열렸다.
그렇다, 소곱창이다. 평소같았으면 근처 삼겹살집이나 갔을텐데 말이다. 부장님도 대단하신 분이다. 어떻게 국장님한테서 카드를 받아올 생각을 한 거지?

 

"오늘 씨도 오늘 고생했어. 오늘이 오늘 고생……푸하하핫!"

 

그래도 사회인답게 웃어넘기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웃어넘기기로 했다. 뭐, 소곱창 사주는 사람이니 너그럽게 웃어줘야지. 아니, 아니다. 소곱창의 문제가 아니다. 아, 부장님.
사실 지금 무슨 얘기를 들어도 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말이다. 아, 제기랄! 사람이 행복하면 욕이 나온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고생하셨어요, 오늘 작가님."
"……아니에요, 요운 씨. 저희 부장님 때문에 괜히 오셔서……."

 

손요운. 손요운! 손요운!!! 손요운을 부르다니요, 부장님!! 거기다 손요운이 내 옆에 앉다니! 부장님, 평생 사랑할게요!!!

 

"아니에요. 마침 근처에서 촬영이 있어가지구요. 겸사겸사 들른거죠."

 

아, 배려심도 너무 멋져.
평소에는 일할 때 각본만 주고 설명만 하다보니 사적으로 볼 일이 없었으니까. 이 참에 눈호강도 좀 하는거지. 그러니까 미안해요, 한나 씨. 차장님 옆에서 그렇게 째려보지 마요.

 

"그런데, 작가님. 인기검색어 오르셨더라구요."
"아……. 네……. 마지막화 이후로……."
"그래도 시즌 2 나오면 다시 한 번 인기검색어에 오르실테니까요."

 

아직 개요도 없는 시즌 2 말이죠. 고마워요, 요운 씨. 덕분에 부담감이 늘었어요.
한숨을 내쉬는 날 보더니 요운이 내 빈잔을 채워줬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은 뒤, 요운의 잔 역시 채워줬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히고, 절반정도를 마셨다. 식도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이 느껴졌다. 요운은 운전을 해야했기 때문에 그대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맞다, 요운 씨……. 그러고보니 내일 인터뷰 있으시죠……?"
"아, 네. 그것때문에 사실 작가님한테 여쭤볼 게 있었는데. 서원 씨도 데려올 걸 그랬네."

 

요운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깝다. 꿀에 꿀을 바른 호강을 할 기회였는데.

 

"제가 서원 씨한테도 말하면 되니까요. 아무튼. 빌더쓰 시즌 2에 관한건데요. ……작가님, 괜찮으세요?"
"네, 네, 네……. 괘, 괜찮아요……. 마, 말씀, 하세요……."
"……내일 물어볼까요? 말을 막 더듬으시네. 술 원래 약하세요?"
"아, 아니, 에요……. 괜찮, 아요……. 마, 말씀, 해, 해주세요……."
"작가님……. 일단 바람이라도 쐬실래요?"

 

……뭔가 이상하다. 이제 2잔 마셨을 뿐이다. 내 주량이 1병이니 절대로 취할 리 없다. 나는 요운의 말대로 천천히 일어나 곱창집 바깥으로 향했다. 요운이 뒤에서 양해를 구하고는 내 어깨를 부축해줘 쉽게 나올 수 있었다.
바깥은 찬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눈이라도 내리려는 걸까? 하늘도 구름이 잔뜩 껴 보이는 것이 영 찝찝했다. 건물 벽에 기대고 서 있으니 요운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내 옆에 마주섰다. 비록 길거리에 사람은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조금 괜찮아요?"

 

요운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원래 이러지 않는데……."
"괜찮아요. 몸이 안좋을 수도 있죠."
"그래서……. 하려던 말씀이 뭐였죠……?"
"네, 그, 빌더쓰 시즌 2요."
"아, 아, 네……. 시, 시, 시즌 2요……."
"작가님?"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온다. 도대체……?

 

"……작가님?"

 

나를 다시 부축하려는 요운에게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저런 국민배우랑 붙어있다가 들키면 무슨 꼴이 날 줄 알고.

 

"그냥, 이, 이, 이 상태, 로……."
"……그……. 내일 인터뷰 때문에요. 시즌 2는 어떤 방향으로 쓰실건지……."
"시, 시즌 2, 는……아, 아직 구, 상만 하, 하고 이, 있어요……. 주, 주, 주역을, 교체, 하, 할까, 도, 고, 고민 주, 중 이구요……."
"작가님, 이대로 들어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한석영 부장님께 말씀드릴테니까……."
"주, 주역으, 로는……뒤, 뒤통수 친 그, 그, 그 새끼로……."

 

요운이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 채로 부축해 길거리로 데려가려 했다. 택시라도 잡아주려는 거 겠지. 마음이 불안하다. 나는 손목에 찬 묵주를 손가락으로 굴려…….

……묵주? 그런 게 있었나? 항상 손목에 차고 있던 아버지의 유품……. 아니, 무슨 헛소리야. 멀쩡히 살아계신 분한테 무슨…….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했다. 깨질 듯이 아파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무언가가 끊임없이 입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마치 천기누설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 새, 새끼 이름이……그, 그, 그러니까, 저, 정수혁 씨 배, 배, 배역, 이름, 이……."
"알겠어요, 그 새끼고 저 새끼고 정수혁 씨고 일단은 댁에 돌아가셔서……."

 

무언가가 깨져간다. 어디선가 쨍그랑, 하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거칠게 깨져간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묻어져가고, 잊혀져간다.

 

마치 우리 모두의 '추억'처럼…….

 

"저, 정, 해, 준……."

 

우뚝.
그래, 우뚝, 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요운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네?"

 

그리고 나는.

 

"……작가님?"

 

'나'는.

 

"……오늘 씨?"

 

그리고 '그'는…….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요운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는…….

그 자리에는……무지개가 떠 있었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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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문피아,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하시는 밀렘 님의 '그 드라마의 15화'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15화'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핸드폰 알람이 방 안에 울려퍼졌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도 아침에 들으면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하루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껐다. 시계를 보니 7시 20분. 하루의 시작시간이었다. 늘 두던 곳에 있는 안경을 힘겹게 쓰고, 기지개를 한번 쭈욱 폈다. 시큰거리기 시작한 허리에선 뚜둑,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그때, 방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아, 일어났어? 벌써 7시 반이야."
"응……. 일어났어어……."

 

나는 늘어지게 대답하고 방문을 열었다.

오늘은 BUILD THE EARTH, 줄여서 '빌더쓰'라 부르는 드라마의 완결 기념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그리고 나는 그 드라마의 작가로서, 마지막 화에서 감탄을 금치 못한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선호를 받는 두 명중 하나였다. 다른 한명은 마지막 화에서 그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 캐릭터였고.

그것을 떠올리니 위가 욱신거렸다. 약간 의기소침해져 아침을 깨작거리고 있자니 식탁 건너편에서 아빠가 걱정스런 눈을 했다.

 

"어디 아파? 밥을 전혀 못먹네."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인터뷰 때문에."
"그러니까 엄마가 말했잖아. 그렇게 끝내지 말라니까?"
"아, 엄마. 그렇게 끝내야 후속작이 터진다니까……."

 

궁시렁거리면서 밥을 억지로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위가 시큰거리는 건 시청자 게시판의 지분을 너무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객센터에서도 쏟아지는 전화때문에 직원들의 눈초리를 받는 것 때문일 지도 모르고.

 

"출근하기 싫다……."

 

나는 그렇게 모든 직장인들의 원망을 입에 담으며 머리를 감았다.

 

* * *

 

"안녕하세요, 한나 씨."
"네, 안녕하세요. 잠 못잤어요? 되게 힘들어 보이네."
"인기검색어때문에 조금……."
"신경쓰지 마요. 1주일 뒤에는 찬양하는 글만 올라올걸요?"

 

옆자리에 앉은 직원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김한나. 빌더쓰 드라마의 기획팀 중 한명이다. 그리고 나랑 가장 친한 직원이고.

 

"1주일인가요. 엠바고가 제대로 될 지……."
"그쪽 기자들 이젠 믿을 만 하니까요. 예전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 정신 차렸잖아요."
"그래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내가 딱했는지 한나는 파티션 위로 팔을 걸쳤다.

 

"오늘 씨. 걱정말라니까? 그리고 유출돼도 그건 그것대로 효과 보는거고. 나 예전에는 일부러 유출시키고 그랬으니까."
"……네."
"자, 기운 내고 힘차게 일합시다. 오늘도 월급루팡 해야죠."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 난 입술을 씰룩거리며 한나를 바라봤다. 아, 하지 말까? 안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술은 뇌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 씨는 해도 전 루팡 안하거든요……?"

 

긴 적막. 한심한 농담이다. 간만에 내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려봤다. 아버지, 어째서 제 이름을 이렇게 지으셨나요? 그래도 한나는 이해한건지 히죽 웃었다. 다행이다. 오늘이란 이름으로 친 헛소리를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노트북으로 눈을 돌렸다.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는 빌더쓰의 시나리오가 펼쳐져 있다.
빌더쓰 시즌 2는 어디까지나 개요만 정해져 있었다. 이제부터 어째서 박제영이 그런 행동을 저질러 왔는가, 그리고 다른 캐릭터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전부 설명해야 한다. 그것도 국장님을 출연시키면서 말이다.
한숨뿐이 나오지 않았다. 국장님. 국장님! 아, 국장님!
물론 자식사랑이 나쁘단 건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는 직원들도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기억하렴, 꼬마야. 네 아버지의 사랑은 고통과 절규 위에 쌓여 올려진 것이란다.

자, 그렇다면 문제. 국장님의 분량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박서원, 손요운 등의 최고의 인기 캐릭터들은 물론 구민석을 사랑하는 아줌마 팬들까지 사로잡기 위한 시나리오를 16부작 내로 서술하시오. (단, 신인 배우 정수혁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그렇다. 정수혁. 드라마 마지막 화에서 박제영을 찌르고 도망친, 또 한명의 시청자 게시판 대주주. 각본을 받자마자 경악을 하며 날 바라보던 그 눈은 여전히 잊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조연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최고의 인기를 내달리던,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희생해 모든 걸 막으려던 애를 냅다 뒤통수 갈기고 도망친 것이다.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애가 말이다.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장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뭐? '시즌 2 만들려면 이렇게 막나가야 돼!'라니요. 물론 덕분에 순식간에 인기검색어에 오르고 다시보기 이용횟수가 마지막 화에서는 100만회를 찍은 거지만. 보너스는 덤이었다. 그리고 국장님도 덤으로 출연하시고.
결국 몇 번이나 썼다 지운 시나리오를 다시 싹 지워버렸다.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고 신음을 내고 있자니 파티션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나가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오늘 씨, 잘 안돼?"
"네……. 처음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어요……. 한나 씨……. 한나 씨는 시즌 2 때 누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박서원."

 

칼같은 대답이었다. 그래, 역시 박서원을 주인공으로 해서 쓰는 게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길이겠지?

 

"농담이니까 쓰지 마요. 난 박서원은 키 작아서 별로야. 근데, 진짜 힘든가보네……."

 

키보드 위로 머리를 눕히는 시늉을 하니 한나는 파티션 위에 턱까지 괴고 날 보고 있었다. 안쓰러워하는 눈길이 거의 우리 엄마와 닮은건 기분탓이겠지.
빤히 보고있다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물었다.

 

"……커피?"
"콜."

 

* * *

 

"그래서, 뭐가 문젠데요?"

 

그리하여 옥상. 한나는 커피를 한 손에 들고는 내게 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우선순위를 세우며 한나의 물음에 답했다.

 

"일단은 국장님이요……. 그……. 배역을 아직 못정해서……."
"그래도 조연정도면 충분하실걸? 왜, 저번에 그랬잖아요. '요즘은 나같은 늙은이가 나오면 시청률 떨어져!' 하면서."
"그래도……뭔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캐릭터가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그냥 지나가던 선비 정도로 등장했잖아요……. 그래서……. 좀 큰 역할로……. 저승사자라던가……."
"에이, 저승사자는 좀 심했다. 그냥 사자는?"
"한국에 무슨 사자가 있어요……. 호랑이라면 모를까……."
"그러면, 독립군 호랑이는 어때?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솔깃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고민해보기로 했다. 예를 들어서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독립군 호랑이라던가.

 

"아니, 농담이니까 그만둬요……. 그러면, 일단 국장님은 제쳐두고. 그, 뭐야, 걔. 뒤통수."
"정수혁 씨 역할이요……?"
"맞다, 걔 이름도 없었지. 걔는 어떻게 할거에요?"

 

고마워요, 한나 씨. 덕분에 고민거리 우선순위가 바뀌게 생겼어요. 일단 정수혁 씨 부터 게시판 대주주 자리에서 내려드려야했지.
고민하고 있는 내가 정말로 안쓰러웠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부시럭거리며 꺼냈다. 받고나서 보니 금박에 쌓여진 초콜릿이었다.

 

"에이씨, 금연할라고 산건데. 이러다 오늘 씨랑 맞담배 피겠네."
"……안필거에요."
"아무튼. 일단 걔 이름이라도 좀 정해요. 아니면 걜 주인공으로 써도 될 것 같은데."

 

이번에도 농담이겠지, 하며 한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한나는 생각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아요? 걔가 왜 그런 짓을 했는 지 설명하면서 박제영이랑 엮는거지. 어때?"

 

……괜찮은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쪽으로 일단 한번 써보자. 그러기 위해선 그 뒤통수, 걔 이름을 정해야 했다.
배우의 성은 그대로 가지고 이름을 짓는 게 어째선지 불문율이 된 드라마였기에 자연스럽게 정 씨가 됐다.
그러면 이제 이름을 정해야……정해……야…….

 

정……해…….

 

……정……해…….

 

"……해준."
"응? 오늘 씨, 뭐라고 말 했어요?"
"뒤통수, 걔 이름이요……. 정해준, 어때요……?"

 

잠시 고민하던 한나는 히죽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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