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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24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 그 헌터의 임대 아파트(3)

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진보람 님의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승찬이 뒤를 돌아본 곳에는 김동주가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감시하는 듯한 모습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늘은 조금 어떻던가."
"평소랑 같았죠.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동주는 두 눈을 손가락으로 몇 차례 누르고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 표정에는 진심으로 피곤함이 가득해 보였다. 승찬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다시 돌려 치료기를 바라봤다. 치료기 안에는 식물의 뿌리같은 것들이 수없이 얽혀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승찬은 알고 있다. 이 안에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 잠들어 있음을.

지호가 여왕을 물리치고 난 뒤, 세상은 너무나도 변했다. 균열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자 시민들의 두려움은 얼마동안 사라진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팔에 비늘이 생기고,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윽고 사회에서 도태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차별받고,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퇴출됐다. 종교단체에서는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지만 실상은 그들을 악으로 규정짓는 행위였다.
정치권에서는 그들을 위한 정책들을 발표했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지는 않았다. 연예인들이 TV에서 감정에 호소했지만 그들의 이중성이 밝혀질 때마다 더욱 소외받는 것은 변하기 시작한 사람들, 변화자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민들이 움직였다. 

가장 먼저 균열에서 넘어왔던 사람들에게 화살이 돌려졌다. 어느날 의문의 시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그 범인으로 균열 생존자가 지목됐다. 법정에서는 정당방위였음을 수차례 변호했지만, 법은 기울대로 기운 민심의 손을 들어줬다.
이윽고 이 사건은 방아쇠가 되어 그들 모두를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뉴스와 신문은 연일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시위대가 피켓을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균열 생존자와 변화자들은 조금씩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고, 적은 세계 그 자체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수면 위로 올라올 틈도 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당장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게 되자 앞뒤 가릴 수가 없어 화살을 돌릴 곳을 찾던 그들은 마침내 훌륭한 방패를 얻었다.

그것이 이지호 헌터였다.

그들은 주장했다. 만일 이지호 헌터가 균열 생존자들과 어울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주장했다. 만일 이지호 헌터가 여왕을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주장했다. 만일 이지호 헌터가 여왕의 힘을 모두 흡수했더라면.
그들은 주장했다. 밑도 끝도 없이 주장했다.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헛소리였지만, 이미 당겨진 도화선을 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지호는, 세상에게 버려졌다.

균열의 외딴 곳에 지어진 자그마한 아파트에 거처가 정해진 지호는 순순히 말에 따랐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강했으니까.
한동안 잠잠해진 여론과 반대로, 이번엔 지호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식물의 뿌리같은 것이 날개처럼 등에서 자라기 시작하고, 비늘이 온 몸을 뒤덮었다. 눈동자가 붉게 변할 때 쯤, 그의 모습은 이전의 여왕과도 닮아있었다.
그를 가끔 보러오던 친구들조차 발길을 끊기고 몇 달이나 지났을까. 선글라스를 낀 동주가 찾아왔다.

"몸은 좀 어떤가."
"크르아아각."
"……성대도 변화가 일어났나 보군. 머릿속으로 말해보게. 할 수 있겠지."

지호였던 것의 고개가 돌아가고, 눈이 새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지 마요.'
"그럴 수는 없지. 앞으로도 말이야."
'오지 마요.'
"자네는 이제 위험인물이 됐어. 누군가는 감시를 해야하지. 그리고 그게 하필이면 전 소장이었던 내가 됐고."
"그르아아가아!!"

그것이 괴성을 지르며 팔을 휘젓자 집안의 물건들이 한순간 공중에 들어올려졌다가 산산조각나며 떨어졌다. 이형 에너지가 온 방을 휩쓸기 시작하며 태풍을 일으켰다. 이형 에너지의 바람이 동주의 몸을 거세게 휘몰아 쳤고, 그 때문에 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선글라스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겨지고 나자 그 너머에서 새하얗게 변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륵……카륵……!"
"그래, 변화자. 정신계 각성자들은 눈동자가 변하더군."

그의 모습을 본 괴물은 이형 에너지를 멈추었다. 방을 몰아치던 잡동사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요.'
"아니, 우리의 잘못이다."
'미안해요.'
"대원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어. 우리의 이기심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그것이 대원이라면 더더욱."

괴물은 끄륵 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그것은 어찌보면 울고있는 것 처럼 보였다. 동주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 옆에 앉았다. 덩치가 큰 그였건만 괴물의 옆에 앉으니 어린아이처럼 작아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팔을 뻗어 괴물의 등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전 괴물이 됐어요.'
"대원은 영웅이야. 누구도 대원에게 책임을 말할 수는 없어."
'전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요.'
"나를 구했어. 우리를 구했고."

괴물은 천천히 손을 펴보였다. 나뭇가지와도 같은 얇은 마디들에 푸른 비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마디들이  구부러졌다, 펴졌다.

'이거 봐요. 이제 예전의 이지호는 더이상 없어요.'

버적, 버적 하는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얼굴이 동주를 향했다.

'날 봐요. 뭐가 떠올라요?'
"여왕."
'네. 여왕. 제가 삼킨 여왕의 이형 에너지들이 제 몸에 흐르는 게 느껴져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왕의 의식이 떠올라요. 저는……저는 이제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대원은 대원이야. 세상을 구했던 이지호 헌터. 그게 자네야."

빠그작, 하며 괴물의 입가가 부스러져 찌그러졌다. 그것이 지호가 지을 수 있는 비웃음이었다.

'여기에 어째서 왔는지 알고 있어요.'
"……."
'괜찮아요. 저도 이제……쉬고 싶어요. 더 이상 뭔가를 부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다."
'괜찮아요. 소장님 덕분에 결심이 섰어요. 승찬 아저씨도 들어오라고 해요.'

그 말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승찬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혐오스러워 하는 표정이 순간 지나쳤지만, 이내 그는 서글프게 웃으며 괴물의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지호 씨, 난……."
'괜찮아요. 원망하지 않아요. 솔직히, 내가 봐도……그렇잖아요?'
"……미안해요."
'정말 괜찮아요. 진짜에요. 나한테 미안해 하지 마요.'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리고, 비늘이 덮인 나뭇가지들이 승찬에게 다가왔다. 흠칫 하며 승찬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내 나뭇가지들에 뺨을 비볐다. 바스슥, 하며 나뭇가지 비벼지는 소리가 울렸다.

"정말……미안해요. 지호 씨. 이것 밖에 해주지 못해서……."
'괜찮다니까요? 너무 미안해 하지마요.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이래서……제가 너무 부끄럽네요.'
"자랑스러워요. 난, 난 지호씨가……너무 자랑스러워요……. 고마워요……."

이내 나뭇가지들을 부여잡고 승찬이 서럽게 울었다.

치료기에 몸을 뉘인 괴물 위로 보라색의 파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과 동시에 마치 햇볕을 쬔 나무들이 자라듯이 치료기 안을 뒤덮었다. 승찬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편안한 웃음을 짓듯이 입가를 찌그러뜨리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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