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문피아,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하시는 밀렘 님의 '그 드라마의 15화'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15화'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반갑습니다, 오늘 작가님. 잘 부탁드려요."
"네. 잘 부탁드려요……."

 

인터뷰를 위해 회의실로 가니 이미 인터뷰 준비가 끝나있었다. 여기저기에 설치된 조명판과 카메라, 그 한가운데에 있는 새하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이는 김성훈 기자. 그리고 인터뷰 전에 코디네이터의 손에 이끌려서 마구잡이로 정리된 머리와 옷까지.
어색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사무실 사람들은 날 보고는 입을 떠억 벌렸다. 사진 찍지 마요, 부장님.

 

"그러면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네, 그……. BUILD THE EARTH의 시나리오 작가인 오늘입니다……."
"빌드 더 어스. 줄여서 빌더쓰로 불리고 있는데요. 우선 이것부터 여쭤봐야겠죠. 마지막화 방영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사람들의 반응이라. 김성훈 기자님, 당신도 우리 회사 직원이면 알텐데요.

 

"뭐…….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어요……. 시청자 게시판에서 제 이름이 나오지 않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요……."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요."
"그래도 그만큼 빌더쓰를 사랑해주셨다는 거니까요……. 그래도 심한 욕은 안해주셨으면 하는데……."

 

약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 대해 법적조치를 취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개중 일부는 이미 법무팀이 고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네, 드라마를 사랑해주시는 것도 좋지만, 작가님 역시 사람이란 점, 그리고 상처받는다는 점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자, 그럼 화제를 바꿔서.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말해볼까 해요. 먼저 주인공인 손성우. 인간의 영웅인 우투리에 대해서."

 

손성우. 무지개빛 날개를 지닌 인간의 영웅. 그리고 우리 촌스러운 이름의 주인공.
처음에는 이런저런 영웅들이 무작위로 선별됐지만, 부장님이 '야, 우투리! 이름 웃기네!'라 하면서 우투리가 됐다.

 

"손성우는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특히 우투리라 그러면 조금 촌스럽다는 이야기도 있었구요……. 그, 발음이……."
"확실히 그렇죠. 그래도 그런 반응은 쏙 빠졌죠? 진짜 멋지게 등장했잖아요. 솔직히 날개라 그러면 촌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멋졌잖아요."
"아, 날개요……."

 

'작가님, 날개요? 무지개 날개요? 진짜 이대로 가요?'
'저는 말렸는데……. 부장님이…….'
'아아아아악!!!! 개부장!!!!!'

 

난 정말로 말렸다. 그러니 그런 눈 하지 마요, 편집팀 여러분. 내 탓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야근은 부장님 탓이에요.

 

"중국의 손손TV랑 컨텍이 되면서 그쪽 자본을 많이 받은 덕이죠……. 내년 3월부터 단독으로 중국에도 방영되니까요……."
"중국 쪽에서도 이미 광고가 나가고 있죠? 사람들의 반응이 정말 좋던데요! 네티즌들은 벌써 성우 캐스팅을 예측하고 있는데, 오늘 작가님도 보셨나요?"
"네. 정말 쟁쟁한 분들만 올라오더라구요……."

 

응, 정말이다. 그 중에는 할리우드 배우도 있고. 무서운 점은 정말 캐스팅 할 것 같다는 거지.

 

"자, 다음으로 박제영! 박서원 씨가 너무 잘 연기해주셨죠? 그리고 마지막에 뒤통수를 당한 호구 악역이죠."
"아하하……."

 

그리고 내가 욕을 먹고 있는 이유지.

 

"마지막에 그렇게 끝내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음……. 박제영의 업이라고나 할까요……. 나쁜 놈이니까 말이죠…….
"그렇다고 해도 말이죠.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구요?"
"이건 비밀인데……."
"응? 뭔데요?"
"빌더쓰, 시즌 2가 준비되면서 말이죠……."
"시즌 2요?!"

 

기자님. 티나요. 알고 있었잖아요. 그럼에도 성훈은 촬영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부담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와! 시즌 2! 그걸 위한 포석이었군요? 어쩐지 너무 떡밥들이 안풀린다 했다구요!"
"아직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말이죠……."
"좋네요, 시즌 2. 좋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박제영에 대해서 더 여쭤보고 싶은데요……."

 

* * *

 

"자, 시즌 2를 위하여!"
"위하여!"

 

거칠게 유리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빌더쓰 시즌 1의 모든 마무리가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부장님이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회사 앞 소곱창집에서 회식이 열렸다.
그렇다, 소곱창이다. 평소같았으면 근처 삼겹살집이나 갔을텐데 말이다. 부장님도 대단하신 분이다. 어떻게 국장님한테서 카드를 받아올 생각을 한 거지?

 

"오늘 씨도 오늘 고생했어. 오늘이 오늘 고생……푸하하핫!"

 

그래도 사회인답게 웃어넘기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웃어넘기기로 했다. 뭐, 소곱창 사주는 사람이니 너그럽게 웃어줘야지. 아니, 아니다. 소곱창의 문제가 아니다. 아, 부장님.
사실 지금 무슨 얘기를 들어도 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말이다. 아, 제기랄! 사람이 행복하면 욕이 나온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고생하셨어요, 오늘 작가님."
"……아니에요, 요운 씨. 저희 부장님 때문에 괜히 오셔서……."

 

손요운. 손요운! 손요운!!! 손요운을 부르다니요, 부장님!! 거기다 손요운이 내 옆에 앉다니! 부장님, 평생 사랑할게요!!!

 

"아니에요. 마침 근처에서 촬영이 있어가지구요. 겸사겸사 들른거죠."

 

아, 배려심도 너무 멋져.
평소에는 일할 때 각본만 주고 설명만 하다보니 사적으로 볼 일이 없었으니까. 이 참에 눈호강도 좀 하는거지. 그러니까 미안해요, 한나 씨. 차장님 옆에서 그렇게 째려보지 마요.

 

"그런데, 작가님. 인기검색어 오르셨더라구요."
"아……. 네……. 마지막화 이후로……."
"그래도 시즌 2 나오면 다시 한 번 인기검색어에 오르실테니까요."

 

아직 개요도 없는 시즌 2 말이죠. 고마워요, 요운 씨. 덕분에 부담감이 늘었어요.
한숨을 내쉬는 날 보더니 요운이 내 빈잔을 채워줬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은 뒤, 요운의 잔 역시 채워줬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히고, 절반정도를 마셨다. 식도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이 느껴졌다. 요운은 운전을 해야했기 때문에 그대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맞다, 요운 씨……. 그러고보니 내일 인터뷰 있으시죠……?"
"아, 네. 그것때문에 사실 작가님한테 여쭤볼 게 있었는데. 서원 씨도 데려올 걸 그랬네."

 

요운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깝다. 꿀에 꿀을 바른 호강을 할 기회였는데.

 

"제가 서원 씨한테도 말하면 되니까요. 아무튼. 빌더쓰 시즌 2에 관한건데요. ……작가님, 괜찮으세요?"
"네, 네, 네……. 괘, 괜찮아요……. 마, 말씀, 하세요……."
"……내일 물어볼까요? 말을 막 더듬으시네. 술 원래 약하세요?"
"아, 아니, 에요……. 괜찮, 아요……. 마, 말씀, 해, 해주세요……."
"작가님……. 일단 바람이라도 쐬실래요?"

 

……뭔가 이상하다. 이제 2잔 마셨을 뿐이다. 내 주량이 1병이니 절대로 취할 리 없다. 나는 요운의 말대로 천천히 일어나 곱창집 바깥으로 향했다. 요운이 뒤에서 양해를 구하고는 내 어깨를 부축해줘 쉽게 나올 수 있었다.
바깥은 찬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눈이라도 내리려는 걸까? 하늘도 구름이 잔뜩 껴 보이는 것이 영 찝찝했다. 건물 벽에 기대고 서 있으니 요운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내 옆에 마주섰다. 비록 길거리에 사람은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조금 괜찮아요?"

 

요운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원래 이러지 않는데……."
"괜찮아요. 몸이 안좋을 수도 있죠."
"그래서……. 하려던 말씀이 뭐였죠……?"
"네, 그, 빌더쓰 시즌 2요."
"아, 아, 네……. 시, 시, 시즌 2요……."
"작가님?"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온다. 도대체……?

 

"……작가님?"

 

나를 다시 부축하려는 요운에게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저런 국민배우랑 붙어있다가 들키면 무슨 꼴이 날 줄 알고.

 

"그냥, 이, 이, 이 상태, 로……."
"……그……. 내일 인터뷰 때문에요. 시즌 2는 어떤 방향으로 쓰실건지……."
"시, 시즌 2, 는……아, 아직 구, 상만 하, 하고 이, 있어요……. 주, 주, 주역을, 교체, 하, 할까, 도, 고, 고민 주, 중 이구요……."
"작가님, 이대로 들어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한석영 부장님께 말씀드릴테니까……."
"주, 주역으, 로는……뒤, 뒤통수 친 그, 그, 그 새끼로……."

 

요운이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 채로 부축해 길거리로 데려가려 했다. 택시라도 잡아주려는 거 겠지. 마음이 불안하다. 나는 손목에 찬 묵주를 손가락으로 굴려…….

……묵주? 그런 게 있었나? 항상 손목에 차고 있던 아버지의 유품……. 아니, 무슨 헛소리야. 멀쩡히 살아계신 분한테 무슨…….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했다. 깨질 듯이 아파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무언가가 끊임없이 입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마치 천기누설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 새, 새끼 이름이……그, 그, 그러니까, 저, 정수혁 씨 배, 배, 배역, 이름, 이……."
"알겠어요, 그 새끼고 저 새끼고 정수혁 씨고 일단은 댁에 돌아가셔서……."

 

무언가가 깨져간다. 어디선가 쨍그랑, 하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거칠게 깨져간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묻어져가고, 잊혀져간다.

 

마치 우리 모두의 '추억'처럼…….

 

"저, 정, 해, 준……."

 

우뚝.
그래, 우뚝, 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요운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네?"

 

그리고 나는.

 

"……작가님?"

 

'나'는.

 

"……오늘 씨?"

 

그리고 '그'는…….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요운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는…….

그 자리에는……무지개가 떠 있었다.

Posted by Bule
,

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문피아,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하시는 밀렘 님의 '그 드라마의 15화'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15화'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핸드폰 알람이 방 안에 울려퍼졌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도 아침에 들으면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하루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껐다. 시계를 보니 7시 20분. 하루의 시작시간이었다. 늘 두던 곳에 있는 안경을 힘겹게 쓰고, 기지개를 한번 쭈욱 폈다. 시큰거리기 시작한 허리에선 뚜둑,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그때, 방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아, 일어났어? 벌써 7시 반이야."
"응……. 일어났어어……."

 

나는 늘어지게 대답하고 방문을 열었다.

오늘은 BUILD THE EARTH, 줄여서 '빌더쓰'라 부르는 드라마의 완결 기념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그리고 나는 그 드라마의 작가로서, 마지막 화에서 감탄을 금치 못한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선호를 받는 두 명중 하나였다. 다른 한명은 마지막 화에서 그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 캐릭터였고.

그것을 떠올리니 위가 욱신거렸다. 약간 의기소침해져 아침을 깨작거리고 있자니 식탁 건너편에서 아빠가 걱정스런 눈을 했다.

 

"어디 아파? 밥을 전혀 못먹네."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인터뷰 때문에."
"그러니까 엄마가 말했잖아. 그렇게 끝내지 말라니까?"
"아, 엄마. 그렇게 끝내야 후속작이 터진다니까……."

 

궁시렁거리면서 밥을 억지로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위가 시큰거리는 건 시청자 게시판의 지분을 너무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객센터에서도 쏟아지는 전화때문에 직원들의 눈초리를 받는 것 때문일 지도 모르고.

 

"출근하기 싫다……."

 

나는 그렇게 모든 직장인들의 원망을 입에 담으며 머리를 감았다.

 

* * *

 

"안녕하세요, 한나 씨."
"네, 안녕하세요. 잠 못잤어요? 되게 힘들어 보이네."
"인기검색어때문에 조금……."
"신경쓰지 마요. 1주일 뒤에는 찬양하는 글만 올라올걸요?"

 

옆자리에 앉은 직원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김한나. 빌더쓰 드라마의 기획팀 중 한명이다. 그리고 나랑 가장 친한 직원이고.

 

"1주일인가요. 엠바고가 제대로 될 지……."
"그쪽 기자들 이젠 믿을 만 하니까요. 예전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 정신 차렸잖아요."
"그래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내가 딱했는지 한나는 파티션 위로 팔을 걸쳤다.

 

"오늘 씨. 걱정말라니까? 그리고 유출돼도 그건 그것대로 효과 보는거고. 나 예전에는 일부러 유출시키고 그랬으니까."
"……네."
"자, 기운 내고 힘차게 일합시다. 오늘도 월급루팡 해야죠."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 난 입술을 씰룩거리며 한나를 바라봤다. 아, 하지 말까? 안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술은 뇌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 씨는 해도 전 루팡 안하거든요……?"

 

긴 적막. 한심한 농담이다. 간만에 내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려봤다. 아버지, 어째서 제 이름을 이렇게 지으셨나요? 그래도 한나는 이해한건지 히죽 웃었다. 다행이다. 오늘이란 이름으로 친 헛소리를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노트북으로 눈을 돌렸다.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는 빌더쓰의 시나리오가 펼쳐져 있다.
빌더쓰 시즌 2는 어디까지나 개요만 정해져 있었다. 이제부터 어째서 박제영이 그런 행동을 저질러 왔는가, 그리고 다른 캐릭터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전부 설명해야 한다. 그것도 국장님을 출연시키면서 말이다.
한숨뿐이 나오지 않았다. 국장님. 국장님! 아, 국장님!
물론 자식사랑이 나쁘단 건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는 직원들도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기억하렴, 꼬마야. 네 아버지의 사랑은 고통과 절규 위에 쌓여 올려진 것이란다.

자, 그렇다면 문제. 국장님의 분량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박서원, 손요운 등의 최고의 인기 캐릭터들은 물론 구민석을 사랑하는 아줌마 팬들까지 사로잡기 위한 시나리오를 16부작 내로 서술하시오. (단, 신인 배우 정수혁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그렇다. 정수혁. 드라마 마지막 화에서 박제영을 찌르고 도망친, 또 한명의 시청자 게시판 대주주. 각본을 받자마자 경악을 하며 날 바라보던 그 눈은 여전히 잊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조연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최고의 인기를 내달리던,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희생해 모든 걸 막으려던 애를 냅다 뒤통수 갈기고 도망친 것이다.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애가 말이다.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장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뭐? '시즌 2 만들려면 이렇게 막나가야 돼!'라니요. 물론 덕분에 순식간에 인기검색어에 오르고 다시보기 이용횟수가 마지막 화에서는 100만회를 찍은 거지만. 보너스는 덤이었다. 그리고 국장님도 덤으로 출연하시고.
결국 몇 번이나 썼다 지운 시나리오를 다시 싹 지워버렸다.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고 신음을 내고 있자니 파티션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나가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오늘 씨, 잘 안돼?"
"네……. 처음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어요……. 한나 씨……. 한나 씨는 시즌 2 때 누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박서원."

 

칼같은 대답이었다. 그래, 역시 박서원을 주인공으로 해서 쓰는 게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길이겠지?

 

"농담이니까 쓰지 마요. 난 박서원은 키 작아서 별로야. 근데, 진짜 힘든가보네……."

 

키보드 위로 머리를 눕히는 시늉을 하니 한나는 파티션 위에 턱까지 괴고 날 보고 있었다. 안쓰러워하는 눈길이 거의 우리 엄마와 닮은건 기분탓이겠지.
빤히 보고있다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물었다.

 

"……커피?"
"콜."

 

* * *

 

"그래서, 뭐가 문젠데요?"

 

그리하여 옥상. 한나는 커피를 한 손에 들고는 내게 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우선순위를 세우며 한나의 물음에 답했다.

 

"일단은 국장님이요……. 그……. 배역을 아직 못정해서……."
"그래도 조연정도면 충분하실걸? 왜, 저번에 그랬잖아요. '요즘은 나같은 늙은이가 나오면 시청률 떨어져!' 하면서."
"그래도……뭔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캐릭터가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그냥 지나가던 선비 정도로 등장했잖아요……. 그래서……. 좀 큰 역할로……. 저승사자라던가……."
"에이, 저승사자는 좀 심했다. 그냥 사자는?"
"한국에 무슨 사자가 있어요……. 호랑이라면 모를까……."
"그러면, 독립군 호랑이는 어때?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솔깃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고민해보기로 했다. 예를 들어서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독립군 호랑이라던가.

 

"아니, 농담이니까 그만둬요……. 그러면, 일단 국장님은 제쳐두고. 그, 뭐야, 걔. 뒤통수."
"정수혁 씨 역할이요……?"
"맞다, 걔 이름도 없었지. 걔는 어떻게 할거에요?"

 

고마워요, 한나 씨. 덕분에 고민거리 우선순위가 바뀌게 생겼어요. 일단 정수혁 씨 부터 게시판 대주주 자리에서 내려드려야했지.
고민하고 있는 내가 정말로 안쓰러웠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부시럭거리며 꺼냈다. 받고나서 보니 금박에 쌓여진 초콜릿이었다.

 

"에이씨, 금연할라고 산건데. 이러다 오늘 씨랑 맞담배 피겠네."
"……안필거에요."
"아무튼. 일단 걔 이름이라도 좀 정해요. 아니면 걜 주인공으로 써도 될 것 같은데."

 

이번에도 농담이겠지, 하며 한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한나는 생각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아요? 걔가 왜 그런 짓을 했는 지 설명하면서 박제영이랑 엮는거지. 어때?"

 

……괜찮은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쪽으로 일단 한번 써보자. 그러기 위해선 그 뒤통수, 걔 이름을 정해야 했다.
배우의 성은 그대로 가지고 이름을 짓는 게 어째선지 불문율이 된 드라마였기에 자연스럽게 정 씨가 됐다.
그러면 이제 이름을 정해야……정해……야…….

 

정……해…….

 

……정……해…….

 

"……해준."
"응? 오늘 씨, 뭐라고 말 했어요?"
"뒤통수, 걔 이름이요……. 정해준, 어때요……?"

 

잠시 고민하던 한나는 히죽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Posted by Bu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