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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9.03 [겨울왕국 2] 서리 고리(1)

"여왕 폐하, 일어나 주십시오."

차마 흔들어 깨우지 못하는 애타는 소리에 아렌델의 여왕, 안나는 심드렁하게 눈을 떴다. 눈 앞의 탁자에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여러 대신들이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잡은 안나는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결론은 났나?"
"그게……."
"도대체 아버님께서는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국정을 맡기신거지?"

대신들은 또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은 한 대신만이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

그러나 그것 조자 잘라내듯, 안나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은 대신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안나는 코웃음을 치며 따지듯이 한명한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당신들이 뒤에서 날 두고 뭐라고 하는 지 알고 있어. 아버지 후광이나 받고 왕위에 오른 계집애.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광이나 받던 여자애가 뭘 알겠냐며 시시덕 거렸겠지."
"폐하, 저희는!"
"그래, 그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애가 현명하신 대신들에게 묻고 있네. 실컷 선왕의 녹을 빨아먹던 그대들이라면 이 어린 계집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지?"

히죽거리며 대신들을 비웃던 안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자, 저 가증스러운 노덜드라 족들을 어떻게 할 텐가?"


노덜드라. 마법의 숲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한 때는 아렌델의 외곽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던 집락이었지만 안나의 할아버지, 루나드 선왕 때에 이르러서는 그의 정책과 정복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 아렌델이란 왕국 하나가 아직까지도 집락 하나를 멸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그녀의 아버지, 아그나르 왕 조차 노덜드라 정복 전쟁에서 그 목숨을 다했으니 아렌델에 있어서 노덜드라는 반드시 멸망시켜야하 할, 하나의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린 나이에 여왕에 즉위한 안나로서는 그러나, 그런 것은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그깟 촌락 하나 멸망시키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국력을 낭비했던가? 안나 자신으로서는 그것만한 우둔한 정책도 없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멍청함을 이어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군대란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국민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지로 몰아세우는 것을 군대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가 여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노덜드라 정복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시작한 전쟁이다. 그것은 이미 국가의 숙원인 것이고, 노덜드라는 이미 아렌델의 진노를 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델은 촌락 하나를 정복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선왕에 이르러서는 정복전쟁 와중에 명을 달리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상황인가? 주변 국가에서는 아렌델의 국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서덜랜드의 열세 번째 왕자인 한스와의 정략결혼 이야기가 나올 지경까지 오게 됐다.
아렌델에 있어서 노덜드라의 정복은 더 이상 정복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덜드라의 정복전쟁이 회의적인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희생이 나왔고, 이득이라곤 전혀 없는 이 전쟁을 그만두자는 이야기도 많다. 
국가의 자존심과 국민들의 희생.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는 당연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또 대신들이다. 그거야 물론, 전쟁이란 훌륭한 장사거리를 버릴 이유가 없으니까. 전쟁은 마을 젊은이들이 하는 것이지,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말이다.


모두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였다.

"그거야 당연히 쥐새끼 한마리까지 모두 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중에서 가장 젊은 대신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아그나르 선왕에게 가장 많은 아첨을 했던 자 이고, 그가 죽으며 가장 손실을 본 자 이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아버님의 울분소리가 들리지도 않습니까? 아그나르 선왕폐하의 한맺힌 목소리가 제 귀에는 똑똑히 들리고 있습니다!"
"그럼 대신의 첫째 아들을 선봉으로 세우지. 가서 저 마법의 숲 한 가운데에 아렌델의 깃발이 휘날리게 할 것을 명하겠네."
"무, 무슨……!"
"자, 다음으로 첫째아들을 선봉에 세울 대신은 앞으로 나오게. 그리고 전하게. 지하에서 내 아버지의 울분소리가 들리는지, 안들리는 지 말이야."

그리고는 젊은 대신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안심하게. 깃발이라면 충분히 준비해 줄 테니. 둘째아들도 한 번 휘둘러봐야 하지 않겠나?"

대신은 이를 꽉 문 채 안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는 고개를 떨궜다. 다른 사람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을 살필 뿐이었다.
안나는 비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따라온 시종들이 열어준 문을 나서며 그녀는 옆에 있는 한 시종에게 말했다.

"말을 준비시켜라."
"예, 폐하."

시종이 달려나가고,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또 다른 여러명의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승마복을 준비해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시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안나는 피로해진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그리고 그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저 마법의 숲은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였다. 험준하기 짝이 없는 지형 탓에 말을 끌고 가기가 어려웠고, 그 탓에 보급선이 길어졌다. 게다가 그 지형을 이용할 줄 아는 노덜드라 족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아렌델의 군대를 상대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배는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흘려온 선혈을 생각한다면 물러나는 것도 버겁다.
승리의 축배는 쓰디 쓰다. 하지만 화평을 하기에는 그 골이 너무나도 깊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안나는 눈을 감은 채로 시녀들에게 물었다. 시녀들은 옷을 갈아입히던 손을 멈추고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노덜드라 족을 말이다. 이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대신들보다야 차라리 시녀들의 조언이 더 도움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도 몰라주는 듯, 시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안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시녀를 턱으로 가리켰다.

"루시, 네 생각은 어떠냐?"
"네? 저, 저요?! 저……저는……."

안나의 또래나 됐을까, 주근깨가 드문드문 박힌 루시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그 주변의 시녀들은 박하게도 그녀를 도와줄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걱정마라. 이 방에서의 대화로 문책할 일은 없으니. 어디까지나 참고삼을 뿐이다."
"그……그러시다면……."

루시는 승마복의 단추를 채우고는 한 걸음 물러나며 안나의 앞에 섰다.

"저는……지난번의 전쟁으로 두 오라버니를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루나드 선왕폐하의 세번째 전쟁에서……한쪽 팔을 잃으셨습니다……. 무, 물론! 루나드 선왕폐하를 위해 팔을 잃으신 것이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아버지께서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마, 마, 만일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그 전쟁에ㅡ"
"루시, 난 전쟁에 대해 물었을 뿐이야."
"……죄송합니다. 하지만……가끔 생각합니다. 만일 전쟁이 없었다면……."

꾸욱 치맛자락을 쥐어잡는 그녀의 모습이 그 뒷말을 이어줬다. 루시는 축축해진 눈가를 소매로 마구 문지르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상입니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루시에게서 시선을 뗀 안나는 그 뒤에서 동의하는 듯한 시녀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몇몇은 훌쩍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였다. 그 옆에 서있던 늙은 시녀장조차 목걸이에 끼워둔 사진을 보며 슬픔에 빠져있는 듯 했다.
안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정돈을 마치고는 자리로 돌아가 허리를 숙이는 시녀들을 뒤로한 채, 그녀는 마굿간으로 향했다.
마굿간에는 시종이 말고삐를 잡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안나의 모습이 보이자 다가와 고개를 숙이는 그를 뒤로한 채, 그녀는 말 위에 올라탔다.

"폐하, 활과 화살을 준비시켰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니. 오늘은 사냥을 하러 가는 게 아니다."
"예? 그러시다면 왕도의 시찰 준비를 하겠……."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골똘히 생각하려는 시종을 뒤로한 채, 안나는 말을 몰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급하게 시종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무시하고는 성을 나섰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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