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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21 [그 드라마의 15화 2차 창작] 그리움을 그리워한다 (마지막)

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문피아,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하시는 밀렘 님의 '그 드라마의 15화'를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15화'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누구도 기억을 되찾길 바라지 않았어요."

 

내가 진정이 되고 나서 그가 맨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말인 즉슨 요운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그 세계'가 무너지던 그 날, 요운은 자신의 대가로 우투리의 기록을 넘겼다. 요운이 우투리로 각성한 것은 불과 몇 달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영웅이란 기록은 요운의 혼이 넘어오기에는 충분한 대가였다. 그렇기에 요운은 기억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오늘'이 대가로 바친 것은 여의주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을 여는 열쇠로서 사용됐기 때문에 혼이 넘어오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오늘'은 기억을 잃은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꿈속에서나 본 듯한, 아련한 기억만이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오늘은 '그 세계', 빌더쓰의 세계를 쌓아올린 작가였다. 그 특수함이 손요운에게 시즌 2, 어쩌면 '오늘'이 겪었던 일을 말하면서 기억이 돌아오고 만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죠."
"그, 그러면……. 구, 구, 국장님 역시 기, 억을……?"
"아뇨. 여의주란 그 용의 흔적이니까요. 그것을 바치신 국장님……. 청룡님 역시 기억이 없으셨어요. 저와 오늘 씨 뿐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말이죠."

 

어쩌면 한명 더 있을 지도 모르죠, 라며 요운은 히죽 웃었다. 나 역시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늘 위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마 나와 요운의 눈에만 보이는 눈일 것이다. 세계가 깨지면서 그 틈새로 불어오는 눈이 불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견고한 세계는 자기 스스로 수복될 것이다.

인간 몇이 세상을 뒤틀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무너뜨릴 수도, 무너져가는 세상을 다잡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곳에서의 기억을 잊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잊지 않는 것이 맞는지.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가족을 잃은 고통을 다시 떠올리는 것 보다는 낫겠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그 기억들을……. 추억들을 잊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요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영웅이었던 요운은 이제와선 꿈속의 존재들까지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요운은 모든 것을 안으려 했다. 그 모든 업을 지고서도 말이다.

 

"저, 저는……. 그런, 건 잘……. 모, 모르겠어요……."

 

한편 나는.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요운처럼 모든 인간을 짊어질, 서원처럼 모든 업을 짊어질, 그 어떤 각오도 하지 않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저 부모님을 다시 한 번 보고싶었을 뿐인,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그래, 다른 모든 사람들 처럼 말이다.

 

"그, 그래도……. 아무, 도, 믿어주지 않을, 거, 거에요……."
"……그러게요. 드라마의 세계가 실제로 있다고 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 그, 그러니까……. 그냥, 두, 두, 두죠……."
"……하지만, 제게는 그 세계의 사람들을 짊어질 책임이……."
"어, 없어, 요……. 요운, 씨는 이, 이제……. 우투, 리, 가 아니니까……."

 

그래, 다른 모든 사람들 처럼 말이다. 요운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저 배우일 뿐이다. 나와 같은 이기적인 사람이고, 모든 인간을 짊어질 필요도 없으며, 모든 업을 짊어질 필요도 없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니까.

 

"아, 아직도……. 자, 자기 자신이, 여, 여, 영웅인 줄 아시는 건가요……?"

 

요운은 나의 말을 듣고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결국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 자만이었군요. 전 더 이상……. 우투리가 아니니까요."

 

* * *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며칠 간 말더듬이가 계속됐다. 단번에 '오늘'의 기억이 돌아온 탓일 것이다. 회사와 부모님에게는 드라마 시즌 2 때문에 긴장해서 그렇다며 웃어넘겼지만 말이다. 속아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지만,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부장님만 빼고.

 

시나리오 작업은 단숨에 이어졌다. 주인공을 정해준으로 내세우고 나니 이야기는 단숨에 풀어져 나갔고, 부장님은 물론 국장님 역시 흡족해 하셨다.
국장님께 시놉시스를 보여드릴 때는 솔직히 긴장했지만, 기억이 돌아온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빌더쓰 인터뷰가 방영되는 날.
나와 부모님은 TV 앞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방송을 봤다. 특집으로 된 인터뷰는 우선 내가 했던 인터뷰가 나오고, 손요운과 박서원을 게스트로 한 패널쇼가 진행되었다.

……내가 한 인터뷰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엄마가 내 등을 두드리며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냐고 핀잔을 줬다고만 하고 싶다. 시즌 2에 대한 것은 손요운과 박서원이 말하는 게 더 임팩트가 큰지 편집되었다. 사실 내가 한 말의 절반정도는 편집되어 결국 내가 한 것은 캐릭터들에 대한 짤막한 설명 뿐이었다.

 

[시즌 2 나오는 거 확정되었나요?]
[그게 얘기가 좀 복잡한데.]
[아니, 도대체 안 복잡한 이야기가 있긴 한가요?]

 

방청객들이 MC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빌더쓰가 캐스팅으로 말이 많았잖아요?]
[제작비 캐스팅한다고 다 날려 먹었나 이야기가 많았죠.]
[그으렇죠. 아무래도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배우만 유명할까. 우투리에, 청룡에, 이무기까지 다 등장하는 마당에.

 

[아, 혹시 그 분들이 계약을 시즌 하나만……?]
[그건 아니고요. 빌더쓰에 나왔던 배우님들은 만약 후속 시리즈가 만들어진다면 그대로 출연하신답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럼 뭐가 복잡한 이야기인가요?]
[국장님이.]
[국장님이?]
[예전에 은퇴하셨잖아요.]
[그쵸. 저 그분 팬이었는데 일찍 은퇴하셔서 너무 아쉬웟어요. 이번에 짧게나마 복귀하셨었죠? 진짜 좋았어요.]

 

자료화면으로 슬쩍 지나가는 선비 한 명이 보였다. 국장님이었다.

 

[국장님이 은퇴한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 막둥이가 태어났대요.]
[……막둥이요?]
[네. 육아한다고 그냥 배우 일 접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하.]
[그런데 국장님이 출연하셨던 드라마나 영화가 너무 옛날 거다 보니까, 막내가 아빠가 배우라는 걸 안믿는다고.]

 

이 세계에서나 그쪽 세계에서나 아들내미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아버지였다.

 

[아, 그래서!]
[네, 그래서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신 건데요.]
[그런데 막상 드라마에 아빠가 나오는 걸 보더니 막내가 엄청 싫어했대요.]
[아니, 왜요? 국장님 되게 멋지게 나오시던데.]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아빠 얼굴 보니까 깬다고.]
[……음. 이해가 되네요. 막내가 몇 살인데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랬던가.]
[아이고, 어리네요.]

 

어리다니. 그럼 지금까지 팀장을 초등학교 4학년 짜리 꼬맹이로 둔 나는 뭐가 되는걸까.

 

[혹시 그래서 드라마 다음 시즌 컨펌이……?]
[에이, 국장님이 그렇게 속 좁으신 분은 아니죠. 아니겠죠. 아들 반응에 상처는 좀 받은 것 같은데, 그게 이유는 아니고요.]
[그럼요?]
[복잡한 이유라고 하더니 아예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시고 계시네.]

 

서원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복잡한 이야기였음을.

국장님의 분량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박서원, 손요운 등의 최고의 인기 캐릭터들은 물론 구민석을 사랑하는 아줌마 팬들까지 사로잡기 위한 시나리오를 16부작 내로 서술하라는 문제의 정답이 국장님을 청룡으로, 박서원과 손요운을 조연으로, 심지어 구민석을 가끔가다 등장하는 회장으로 등장시키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만약 이게 잘못되면 다시 한번 시청자 게시판은 내 이름으로 도배될 것임을.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이번엔 진짜 얘기해 드릴게요.]
[진짜죠?]
[사실 컨펌 났어요.]

 

패널들과 방청객들 사이에선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자막과 CG로는 화려한 팡파레와 꽃가루들이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원은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다음 달부터 촬영 들어가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욕을 했던 그 캐릭터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박서원 씨가 연기한 박제영이 언제부터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있었는지!]
[손요운 씨, 그러면 되게 나쁜 놈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아, 하긴 나쁜 놈은 아니었죠. 마지막에 뒤통수 맞은 호구라면 모를까.]
[이러기에요?]
[이러깁니다.]

 

요운과 서원은 웃음기를 띄며 투닥거렸다. 어깨를 툭툭 치는 그 둘 사이에는 마치 친한 형제같은 연이 보이기도 했다. 요운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치 거짓말 처럼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엄마가 잘자라는 인사를 건넸고, 나 역시 그것에 대답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매만졌다. 엄지손가락의 끝은 통화버튼을 맴돌았고, 결국 그것을 눌렀다. 새하얀 바탕에는 10개의 숫자버튼과 별모양, 그리고 샾모양의 버튼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은 그 세계에서 벗어나기 전에 한 가지를 기도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기도가 아닌, 나에게 하는 기도였다. 사실상 기도라기 보다는 기원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늘'은 벽 하나를 삼켰다. 손바닥에 정자로 꾹꾹 눌러써 벽을 썼고, 그것을 삼켜 마음 속, 혼의 한 곳에 커다란 벽을 세운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한 눈에 보기만 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벽을 말이다.

하지만 그 벽은 다른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벽이었다. 그것은 벽이라기 보다는 담벼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담벼락의 위에 열한자리의 숫자를 적었다.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 수도 없이 써넣어 삼킨 숫자들을 새겨넣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옆에도 적고, 그리고 그 밑에도 적었다. 담벼락이 한가득 찰 때까지 말이다. 마치 낙서라도 하듯이 빼곡한, 그리고 유치한 어린아이의 기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을 믿었다. 그 담벼락의 낙서가 영원토록 남기를.

 

그리고, 나는, 그 담벼락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러자 숫자 하나하나에 깃들은 추억들이 느껴졌다. 아팠던 기억, 괴로웠던 기억, 웃었던 기억, 울었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 무서웠던 기억……. 그 모든것들이 거품처럼 떠올랐다가, 거품처럼 사그라졌다.

핸드폰의 버튼 하나를 누를 때 마다 추억들이 떠올랐다. 일하며 부대꼈던 사람들이, 일하며 만났던 저주들이, 그리고 그 저주에 담겨있는 슬픔이, 과거의 유물들에 담겨있는 한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의 모든것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녀의 추억들이, 기억들이, 하나씩 사그라졌고, 이윽고 내게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리움만이 남아, 나를 맴돌았다.

 

그녀는 그렇게,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담벼락 위에 다소곳이 올라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담벼락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 담벼락 위에 올라앉았다.

 

그렇게, '나'는 그리움을 그리워했다.

 

핸드폰 화면에는 열한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혹시 늦은 이 시간에 폐가 되지는 않을까. 혹시 잘못 누르지는 않았을까. 혹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망설임은 짧았고, 내 엄지손가락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

영원과도 같은 짧은 순간이 지났고, 핸드폰의 너머에선 숨소리가 들려왔다.

 

"……."
"……."

 

고요한 침묵이 익숙하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그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해준 씨, 인가요……?"

 

긴가민가했다. 그가 날 기억해줄까? 날 그리워해줄까? 말을 더듬지 않는 내가 이상하진 않을까?
한참 뒤에서야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 그. 생일 선물, 늦었는데."
"아."

 

연말연초라 바쁠지도 모른다. 다음달 부터는 촬영이 들어가니 각본작업에 또 다시 철야로 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 것이다. 무려 9월부터 있었던 약속이니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가운데에서, 그가 내게 물었다.

 

"받고 싶은 거 생각해 놨어요?"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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