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팬픽 2015. 7. 28. 11:08

옛날옛날, 한 옛날, 왕국의 성에서 공주님이 태어났습니다. 앙증맞은 손, 귀엽게 찡그린 눈, 오밀조밀한 입. 한 눈에 봐도 아름다운 아이로 자랄 것 같았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공주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러자 그게 놀랐더 걸까요? 공주는 으앙, 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렸답니다. 왕도, 왕비도, 성 내의 모든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고 기쁘게 웃었습니다.

공주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새하얀 피부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와 같고, 검은 머리칼은 밤하늘과도 같았으며, 붉은 입술은 작고 조밀해서 앵두와도 같았습니다. 어린나이에도 가지고 있는 기품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공주는 그 기품에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공주는 모든걸 배웠습니다. 승마, 교양, 정치, 예술 등등 공주의 아름다움을 더욱 가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수십번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녀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손에 꼬옥 쥐었습니다.

물론 무도회도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공주는 나가는 무도회마다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춤을 추었습니다. 귀족들의 어린 자제들은 그녀와 말 한마디 섞어보려고, 손 한번 잡아보려고 안달이 났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주는 한쪽 눈을 찡긋여 주었고, 얼굴이 화끈해진 그들은 쪼르르 어머니께 달려가 큰 소리로 '저는 공주님하고 결혼할래요!'하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어머니들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공주는 아가씨가 되었습니다. 공주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성 밖에 줄을 선 사람들은 성을 한 바퀴 두를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주는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태양과도 같은 미소 하나에 나라의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공주의 외모는 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런 소문이 들려오면 공주는 이불을 덮고 슬며시 웃었습니다.

무도회에서 공주는 단연 돋보였습니다. 새초롬한 눈매로 한 번 웃어주기만 하면 청년들은 침을 줄줄 흘리며 그녀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녔습니다. 우연치않게 춤이라도 한 번 추는 날에는 헤벌쭉 한 미소를 짓다가 스텝이 꼬여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했습니다. 신사랍시고 손등에 키스를 해주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손등이 닳지나 않을까 하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꽃다운 처녀들은 공주를 질투했고, 부러워했습니다. 나라의 꽃다운 총각들은 공주를 원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번씩 수백명이 꽃다발을 내밀었고, 수만명이 성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공주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고, 손을 내밀 줄 알고, 웃을 줄 알았습니다. 가엾은 사람을 보면 먹을 것을 베풀고 그 고운 손으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왕과 왕비는 그런 공주가 그저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느덧 공주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풍만한 가슴, 얇은 허리에 쭉 뻗은 다리는 길을 걷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걸을때마다 가볍게 살랑이는 검은 머리결은,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붉은 입술은, 그녀가 웃을 때 마다 빛나는 피부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그녀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도 커다란 문제가 생겼답니다. 바로 결혼이지요. 과연 공주님께 어울릴만한 왕자님이 있을까요? 성의 사람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 한 신하가 그 후보로 이웃나라 왕자님을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왕자님은 공주님께 어울릴 정도로 수려한 외모와 맵시, 그리고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고 말했습니다. 왕과 왕비는 그 왕자님을 떠올리고는 그 신하에게 큰 상을 내렸답니다.

그러나 공주는 내심 회의적이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불안감때문이었죠. 자신이 과연 한 남제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뛰어난 왕자님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시집을 가선 안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아직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이웃나라의 성에서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왕과 왕비는 공주를 무도회에 보내려고 야단이었습니다. 공주를 위한 드레스, 구두, 왕관과 마차까지. 그야말로 공주를 위해서라면 성도 바꿔줄 기세였습니다.

공주가 사뿐히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는 말에게 '이랴!'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말들은 가볍게 울고는 이웃나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부드럽게 달리는 마차 안, 공주는 설레임과 기대감에 들떴습니다. 한편 불안감과 초조함에 떨었습니다. 처음으로 가는 이웃나라, 그곳은 어떤 곳일까요? 그리고 왕자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웃나라의 길에는 공주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주의 외모에 대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과연 공주님이 그 잘생긴 왕자님께 어울릴 만한 여자일까 하면서 말이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세상 그 어떤 여자를 데려와도 왕자님께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없다고.

그리고 마차가 도착을 하자 사람들은 마차문이 열리기만을 기대했습니다. 마부가 내려와 문을 열자, 그 안에서 공주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주의 외모를, 품격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입을 쩍 벌린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또각, 또각하는 구두소리만이 들려왔습니다.

공주가 성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 뒤,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그리고는 공주의 외모를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왕자님께 어울리는 공주님이 나타난겁니다!

무도회장 안,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 떠올라 있었습니다. 음악소리는 흥겹고, 음식은 맛있고, 춤은 흥겨웠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무도회를 즐기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왕자님만이 뚱하게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건성으로 듣고, 그의 앞에 차려진 한가득의 음식들도 깨작거리고는 물려버리고 있었습니다.

왕자는 아까부터 오직 단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주였습니다. 이웃나라 공주의 소식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아름답고, 청초하고, 우아한 그녀를 칭찬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물릴 정도로 들어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흥미없게 듣고 있었지만, 내심 그는 공주를 보고싶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오늘, 바로 이곳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는 사실 들떴습니다. 드디어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그리고 무도회장의 문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문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에서 멈췄습니다. 음악소리는 멈추고,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춤을 추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멈췄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감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는 회장을 메웠고, 공주는 우아하게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가 왕자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왕자 역시 자세를 고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섰습니다. 공주는 공손하게 왕자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왕자 역시 웃으며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공주는 수줍게 손등을 내밀었고, 왕자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림과도 같은 풍경에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다시 흥겨운 음악이 시작되고, 왕자와 공주는 회장의 가운데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사뿐하게, 우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 풍경은 수많은 화가들이 화폭에 담았고, 시인들이 글자로 표현을 하고, 음유시인들이 목청껏 노래를 불렀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결과물들에 고개를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춤이 끝나고, 왕자와 공주는 자리를 옮겼습니다. 작게 꾸며진 방에는 조그마한 탁자와 침대, 그리고 등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왕자가 등을 키자 조금 어둡게 켜진 등은 고급스런 분위기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의자를 빼주었습니다. 공주가 의자에 앉자, 다시 왕자는 의자를 끌여 넣어주었습니다. 탁자에는 와인과 약간의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왕자가 자리에 앉고, 둘은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잔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고, 둘은 둘만의 약속을 가졌습니다.

몇달 뒤, 왕자와 공주는 성대한 결혼식을 열었습니다. 두 나라의 백성 모두가 모인 결혼식에서 두 남녀는 서로의 행복을 서약했습니다. 두 사람의 키스와 함께 종소리가 울렸고, 그 종소리가 사라질때까지 사람들의 환호성은 사라질 줄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 왕자는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공주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왕이 된 왕자는 지혜로운 정치로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왕비는 그런 왕을 조용히 뒷받침해주었으며, 때때로는 왕보다도 지혜로운 말을 속삭여주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백성들이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며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왕비가 5년째 임신을 못하기 전까지는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왕비의 배는 불러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왕은 나라의 용하다는 의사들을 모두 데려왔지만, 왕비는 여전했습니다. 왕은 몹시 괴로워했고, 그런 왕을 보며 왕비는 홀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왕은 혼자서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습니다. 왕의 오랜 친구였던 7개의 산을 넘어에 있는, 7명의 난장이들을 만나러 간겁니다.

난장이들은 오랜 세월을 사는 만큼 인간의 지혜보다 더욱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보석들을 가지고 말이죠. 난장이들은 보석을 받고는 흔쾌히 질문에 답했습니다.

"그건 악마가 왕비의 영혼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비는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된거죠. 그 악마를 왕비에게서 없애는 방법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왕비도 아이를 가지게 되겠지요. 그러나 왕비는 언젠가 그 악마를 마주하게 될겁니다."

이어서 가장 나이많은 난장이가 말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악마를 못알아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악마는 오직 왕비의 영혼만을 원하기 때문이죠. 악마란 한 사람의 영혼을 먹기 위해 사는, 비효율적인 멍청이들이니까요. 하지만, 그 멍청함이야말로 악마들이 무서운 이유지요. 어쩌시겠습니까, 왕이시여. 당신과 만 백성을 위해 왕비와 악마를 마주시키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스런 왕비를 위해 아이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왕은 고민했습니다. 한 나라의 미래가 걸린 왕국의 아이와 자신의 사랑하는 왕비. 어느것도 저울질에 올릴 수 없는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왕은 서신을 보내 현명한 왕비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왕비는, 나라의 미래를 선택했습니다.

난장이들은 왕에게 그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것을 왕비에게 전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보름달이 방 안을 비출 때에 왕비의 손으로 악마의 옷을 짜는 것. 그것이 난장이들이 말해준 방법이었습니다.

왕비는 엄숙하게 물레를 돌렸습니다. 신중하게 한땀한땀 옷가지를 짜 나갔습니다. 하얀 바탕에 검은 나무와 꽃으로 장식된 옷이었습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옷을 짜던 그 때에, 구름이 순간 달빛을 가렸습니다. 갑자기 시야를 잃어버린 왕비는 실수로 손가락을 물레에 찔렸습니다.

붉은 핏물이 그녀의 손가락에 맺혀 또옥, 하고 떨어졌습니다. 왕비는 급히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감쌌습니다. 손수건에 붉은 핏물이 번졌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달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왕비는 먼저 옷을 살폈습니다. 행여나 피가 옷에 떨어지지나 않았을까 하고 말이죠.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그녀가 짜던 하얀 옷은 어느새 붉은 실로 짠 듯 물들어 있었습니다.

왕비가 당황해 하고 있을때,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엄마."

라고.

한 순간, 그녀는 그 말의 주인공을 상상했습니다.

어린 공주님. 세상의 모든 사랑을 받고 자랄 귀여운 아이. 눈처럼 하얗고, 흑단처럼 검고, 핏물처럼 붉은. 왕비를 쏘옥 빼닮은 아이를.

그리곤 그녀의 눈 앞에 어여쁜 꼬마가 나타났습니다. 발 끝까지 오는 금발, 인형처럼 고운 외모와 붉은색 눈동자, 고운 다리와 그 끝에 있는 시커먼 털이 잔뜩 난 발굽. 꼬마는 왕비가 짠 붉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꼬마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히죽, 웃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인 왕비의 눈 앞에 있는것은 빈 받침대와 돌아가는 물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왕비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이어습니다. 한창 식사가 무르익던 그 때, 왕비는 순간 입을 가렸습니다. 그녀의 속에서 시큼한 물이 올라왔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왕비와 눈을 마주친 순간, 왕비가 힘겹게, 그러나 환하게 웃었습니다.

"오오, 오오오오!"

왕은 그렇게 놀라워하며 왕비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왕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곱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수 개월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왕비의 배는 산만하게 불러오고, 진통은 점점 더 심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산파와 왕, 그리고 많은 의사들이 숨을 죽인채 침실에서 왕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숭고하기까지 한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왕국의 성에서 공주님이 태어났습니다. 앙증맞은 손, 귀엽게 찡그린 눈, 오밀조밀한 입. 한 눈에 봐도 아름다운 아이로 자랄 것 같았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공주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러자 그게 놀랐더 걸까요? 공주는 으앙, 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렸답니다. 왕도, 왕비도, 성 내의 모든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고 기쁘게 웃었습니다.

공주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새하얀 피부는 금방 내린 하얀 눈과 같고, 검은 머리칼은 흑단나무와도 같았으며, 붉은 입술은 작고 조밀해서 핏물과도 같았습니다. 어린나이에도 가지고 있는 기품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공주는 그 기품에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공주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왕비는 뿌듯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청초한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은 흡사 왕비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했습니다. 왕비는 항상 미소를 머금으며 생활했습니다. 공주가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공주의 성숙은, 곧, 왕비의 늙음이란 것을.

그날도 왕비는 평민으로 가장한 채 시종 두 명과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여기저기서 공주를 찬양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연신 싱글생글 웃으며 백성들의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까르르 웃는 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아이들의 옆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노래를 듣기 위해 왕비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늙은 장미 시들고 피는 장미 붉게 물드네. 늙은 장미 가시를 세우고 피는 장미 비웃네. 늙은장미야 조심하렴. 정원사가 화분을 버리기 전에!"

그런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은 하하호호 웃었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 다가가던 발이 멈칫 했습니다. 지금 저 아이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가요?

설마, 설마요. 아니겠죠? 늙은 장미가 자신이고, 피는 장미가 공주인건가요? 아니죠? 그렇죠?!

왕비는 동의라도 구하려는 듯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시종 두 명이 키득거리며 숨죽인 채 웃다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단 듯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가 뿌드득 하고 갈렸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늙은 장미 시들고 피는 장미 붉게 물드네. 늙은 장미 가시를 세우고 피는 장미 비웃네. 늙은장미야 조심하렴. 정원사가 화분을 버리기 전에!"

왕비는 그 길로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궁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사람들은 공주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늙어버린 왕비를 비웃는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녀는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노랫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엎드렸습니다. 그녀가 너무 예민한 걸까요? 그냥 아이들의 노래였을 뿐일까요? 그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 질, 그런것에 불과한 걸까요? 왜 그녀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가요.

나라를 위해, 왕을 위해, 가정을 위해 그녀가 안한게, 못한게 무엇이 있었던가요.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습니다. 베개가 눈물에 축축하게 젖을 때 까지 그녀는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그녀는 눈가의 통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려왔습니다. 머리를 손으로 꾸욱 누르며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속 그녀는 눈이 퉁퉁 불어있었습니다. 눈물자국이 눈가에 그래도 남아 있었습니다. 눈가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며 머리를 쓸어올리던 중,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밤하늘처럼 검던 머리엔 은하수가 흐르고, 새하얀 종이같던 피부는 조금씩 구겨져 있었으며, 잘익은 앵두같던 입술은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방을 뛰쳐나왔습니다. 절대로 거울속 모습은 그녀가 아니라고 다짐하면서.

복도는 이미 해가 져서 어두컴컴했습니다. 어스름한 달빛만이 은은하게 복도를 비추고 잇었습니다. 그녀는 촛대를 찾아 들고 복도를 걸었습니다. 토각, 토각 하는 그녀의 발소리는 복도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왕은 침실에 없고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녀가 의구심을 가질 때, 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흔들었습니다. 그녀는 옷깃을 여몄습니다. 어디 창문이라도 열려있는건가 싶어 촛대를 멀리 든 순간, 저 멀리 공주의 방문이 슬며시 열려있는 게 보였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방 안을 살폈습니다. 아름답게 꾸며져있을 방은 밤의 어스름이 가려주고, 침대에는 살며시 부푼 이불이 덮여있었습니다. 공주는 곤히 침대에서 자고 있을 터입니다. 그녀는 딸의 자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든 공주는 이불로 봉긋한 가슴을 가리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검은 머리칼은 그녀의 얼굴에 시냇물처럼 살며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어린 공주의 뒤에, 그녀를 감싼 하나의 팔이, 이 나라를 지탱해온 굵은 팔이, 그녀의 남편이, 너무나도 편한 얼굴의, 공주의 아버지의 얼굴이, 훤히 드러낸 가슴팍이, 그의 발 밑엔 허겁지겁 벗어둔 옷가지들이.

왕비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느 누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함에도.

그녀의 머리는 이것을 이해해버렸습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녀는 웃었습니다. 미친듯이 웃었습니다. 아아, 아아아! 그랬구나, 그랬었어! 시든 장미꽃은 버려져야 하는 법이지요! 그 자리엔 젊은, 싱싱한 장미꽃이 자리해야지요! 파릇파릇한 붉은 장미꽃이 있어야지요! 누가 시들어버린 장미꽃을 찾겠어요?! 안그래요?

그녀의 웃음소리에 왕과 공주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부여잡고 웃고있는 왕비를 본 그들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왕은 허겁지겁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렸고, 공주는 이불로 몸을 감싸습니다. 왕은 최선을 다해 변명하려 했으며 공주는 우물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당연한 이치니까요! 화분에 시든 꽃이 있으면! 당연히 버려야지요! 네, 물론이지요!

그녀는 깔깔거렸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올법 한 마녀와도 같아 왕과 공주는 겁을 먹었습니다. 이내 누가 뭐라할 것도 없이 그 방을 뛰쳐나간 그들을 보며 왕비는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왕비가 문을 나섰을 때, 왕이 골목길에서 쿠당탕 하며 우스운 모습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녀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습니다. 그 왕이 저렇게 추악하게 넘어질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녀는 왕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이, 이건 실수였어! 그냥 술김에, 그래! 술김에 저지른 실수였다고!"

왕은 미친듯이 손을 퍼덕였습니다. 추잡한 물건도 푸득거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우스꽝 스러운가요. 그녀는 얼굴을 붙잡고 웃었습니다.

"왕이시여, 아아! 왕이시여! 어찌 이렇게나 추악해지셨나요? 당신의 딸년이 그렇게나 아름답던가요? 한 나라의 왕이? 제 남편이? 공주의 아버지로서 부끄럽지도 않던가요? 도대체 그 당당하던 왕은 어디 가고 이런 쓰레기만 남게 됬나요?"

왕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미안하단 말을 되풀이 할 뿐이었죠. 그러나 왕비로서는 그저 우스운 극이라도 보는 듯 했습니다. 그것도 3류 쓰레기 극 말이죠. 너무 쓰레기같아서 할 말도 없는 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쓰레기 극도 사랑한답니다. 재밌잖아요? 엉터리 극본을 가지고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자면 우스워 죽겠거든요.

그녀는 사랑하는 왕의 얼굴을 포근히 감쌌습니다. 벌벌 떨던 왕의 얼굴이 한츰 잠잠해졌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정원사님. 물론 제가 늙은 꽃이 되긴 했지요. 하지만, 단 한 마디면 된답니다. 자, 절 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딸을 보세요. 둘을 한 번 비교해 보시라구요. 네? 어서요."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딸과 잔 추잡한 왕이라도, 자신을 버린 남편이더라도,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용서할 수 있었어요. 네, 그게 바로 그녀였죠. 착한 어머니, 상냥한 아내, 존경받는 왕비. 바로 그녀랍니다.

그녀는 그에게 하나의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건 누구죠?"

왕은 순간 주춤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매혹적이었고, 달콤했습니다. 진실만을 대답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진실을 말했답니다. 그녀라면, 아무리 마음에 안드는 대답이라도 용서해줄것이라 믿었습니다. 설령 그 대답이 왕비가 원하던 게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공주."

이렇게 대답하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그 대답과 함께, 왕비는 미소를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그 고운 손으로 왕의 목을 감쌌습니다. 손 마디가 하얗게 변할 때 까지 그녀는 그의 목을 졸랐습니다. 왕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들거리던 왕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마엔 핏줄이 불룩 튀어나오고, 입에선 침이 줄줄 흘러 왕비의 손목을 적셨습니다. 버둥대는 왕의 얼굴은 마치 장미꽃처럼 붉었습니다.

장미꽃이 점점 파랗게 시들어 가자 왕비는 손을 놓았습니다. 왕은 숨을 못쉰 탓에 켁켁거릴 뿐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꺽꺽거리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왕의 귓가에 왕비는 얼굴을 가까이 했습니다. 왕비의 달콤한 숨소리는 왕에겐 독향기로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알아둘게 있어요, 정원사님."

왕비는 품속에서 은빛 막대기를 꺼냈습니다. 끝이 예리하고 손잡이엔 가시많은 장미가 그려진, 아름다운 은장도였습니다. 그녀는 손을 힘껏 위로 들었습니다.

"늙은 장미도 가시가 있단 거."

은장도가 은빛 호를 그리고, 왕비의 얼굴로 뜨뜻하고 끈적이는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왕의 숨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그 손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호가 그려졌는지, 몇 방울의 피가 묻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는, 하아,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새빨간 사과와도 같았답니다. 잘 익은, 독사과처럼 말이죠.

한편,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고있는 왕비의 모습을 본 공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저것이 자신의 상냥한 어머니라니요. 저 '마녀'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라니요! 그녀는 머리를 감싸쥐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에 왕비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자리엔 싱글생글 웃고 있는, 금발에 붉은 옷을 입은, 추한 발굽의 소녀가 서 있었습니다. 문득 왕비는 난장이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언젠가 그 악마를 마주하게 될겁니다."

왕비는 뿌드득, 하고 이를 갈았습니다.

"너로구나! 너였어!! 네가 나의 악마였어!!!!!"

그녀의 고함소리에 경비병이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왕비를 본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쓰러져 있는 왕의 가슴엔 칼이 박혀있고, 왕비는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공주는 벌거벗은 몸으로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본 경비병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들은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니까요.

그런 와중에, 왕비는 그에게 소리쳤습니다.

"뭐하느냐! 저기 국왕을 시해한 역적이 있는데!"

그는 왕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거기엔 공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왕비를 보았습니다.

물론 그가 시키는 대로 일하기는 하지만, 그라고 생각없이 움직이는 허수아비는 아닙니다. 왕의 가슴에 박힌 은장도는 왕비의 것입니다. 피가 잔뜩 튄것만 봐도 왕비가 왕을 시해한 범인이란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그런데도. 그에게도 그런 생각을 할 능력이 있는데도. 틀림없는 사실이 눈 앞에 있는데도. 그는 도저히 왕비를 살인범이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왠지 아세요?

얼굴에 피칠갑을 한 왕비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거든요! 그들이 봐온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그 어느때의 왕비님보다, 심지어 저 앞에 서 있는 나체의 공주님보다도 더욱 아름다워서! 너무나도 매혹적이라서! 왕비님의 모습을 본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네, 우스운 이야기지만, 사실 그는 왕비를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그의 눈에 왕비는 천사로 보였습니다. 사랑스러운, 꼬집어 깨물어주고 싶을정도로 귀여운 천사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천사가, 살인이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네, 그럴리 없다구요. 설령 왕비님이 왕을 시해했더라도, 그는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저 어여쁜 장미꽃이 그럴수는 없으니까요. 천사가 무자비가헤 살인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는 홀린듯이 공주를 향해 비척비척 걷기 시작했습니다. 공주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꼴사납게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경비병은 칼을 빼어들고 공주의 뒤꽁무니를 쫓았습니다. 그 꼴이 너무 우스워서 왕비는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었습니다. 그래요, 이런 쓰레기극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구경거리 아니겠어요?

"공주를 산채로 잡아오너라! 역모죄로 엄중히 처벌할테니까! 저년의 털을 깎고 가죽을 벗긴 뒤, 고기를 조각내어 스프를 끓일 것이다! 그 스프로 오늘 잔치를 열어 내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것이다!"

"후추도 뿌릴 겁니까?!"

저 멀리서 경비병이 신나서 소리쳤습니다. 왕비는 그에게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래! 마음껏 뿌려주마! 저 년의 누린내를 없앤다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느냐! 가서 잡아만 오너라! 그러면 내 너에게 저 년의 머리통을 내어주겠다!"

공주의 머리라! 하얗고 보드라운 육질도 육질이겠지만 통통하고 탐스러운 입술을 생각하니 군침이 절로 돌았습니다. 경비병은 꿀꺽 하고 침을 삼켰습니다. 이제 경비병은 사냥꾼이 되어 공주를 추적했습니다. 그녀의 족적, 그녀의 냄새, 그녀의 흔적을 쫒으며 그녀를 사냥했습니다.

공주는 살기위해 미쳐버린 왕비와 사냥꾼을 피해 성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성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질척이는 땅을 밟으며 그녀는 문득 아버지의 친구라던 일곱 난장이를 떠올렸습니다. 깊은 숲속에 사는 그들이라면 공주를 지켜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왕비는 연신 웃으며 성 안을 배회했습니다. 공주가 사라졌으니 다시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건 자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상상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신하들이 우러러 보는 모습을. 성 안에 걸린 공주의 초상화에 침을 뱉고 진흙발로 밟으며 불에 태우는 모습을. 그리고 그 자리에 걸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치장을 하고 초상화를 그려야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야지요!

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씻어내고 화장을 했습니다. 분을 얼굴에 묻혀 하얗게 칠하고, 입술엔 염료를 칠해 붉게 만들고, 머리엔 먹을 발라 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물었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누구니?"

비가 내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그녀는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밝은 거울 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를. 거울 속 그녀는 지금까지 숱하게 봐온 그녀의 모습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거울 속 그녀에게 방긋 웃었습니다. 그러자 거울 속 그녀도 그녀에게 방긋 웃었습니다.

한 순간,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가까운 곳에 떨어진 듯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섬광이 비췄습니다. 순식간에 어두웠던 방 안이 환하게 밝혀졌다가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거울에 비치는건 그저 정적과 어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보았습니다.

흰눈보다 하얀 피부, 흑단보다 검은 머리결, 핏물보다 붉은 입술을 가지고 입술을 억지로 일그러뜨려 웃고있는 여인의 모습을.

거울에 비친 것은 틀림없이 왕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건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겠죠.

왜냐면 보세요, 거울이잖아요? 그건 당연하다구요.

그러나 질투심에 눈 먼 어리석은 '마녀'가 본 것은.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그년은, 그년은, 그 계집은,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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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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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똑.

 

"언니, 나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주황색 머리를 단저아게 땋아 올린 소녀가 말했다. 기껏해야 스무살 남짓이나 됐을까. 앳되보이는 얼굴엔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심이 가득했다.

 

안나, 그녀는 지금 언니인 엘사의 방문 앞에 서 있다. 무려 15년동안 굳게 닫혀있는 이 문은 그녀가 몇 번의 노크를 해도, 소리쳐 언니의 이름을 불러도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다. 이 문안에서 소리가 들려올리도, 문이 열릴리도 없단것을.

 

얼마나 노크를 했을까? 얼마나 이름을 불렀을까? 그리고 얼마나 이 앞에서 울었을까? 세는걸 포기했을 때, 그녀는 성인이 되었다.

 

안나는 문에 이마를 대었다. 차가운 한기가 문 안에서 타고 흘러왔다. 그 안에는 겨울이라도 살고 있는걸까. 그녀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소를 흘렸다.

 

겨울이라. 그래, 겨울같은 언니였지.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안나와 엘사는 어릴적 매우 친했다. 겨울날이 오면 함께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엘사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이 오면 엘사는 그 차분한 성격을 버리고 안나보다 더 활기차게 뛰어다녔다. 성에있는 꽃밭을 거닐고, 피오르 협곡에 뛰어드는 등 평상시의 엘사라곤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봄이면 산으로 피크닉을 가고, 가을날엔 낙엽을 주우며 다녔다.

 

둘은 어딜 가든 함께였다. 엘사는 안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안나 역시 엘사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서로 맞잡은 두 손을 절대로 놓지 않기로 약속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엘사가 9살이 되던 겨울날, 무슨 이유였을까? 엘사는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안나와의 접촉을 꺼렸다. 아무리 그 방에 들어가려고 노력해봐도, 엘사는 그녀를 밀어내버리고는 방문을 잠궈버렸다. 성에 찾아오는 방문객이 없어진 것도 그때쯤부터였다. 부모님께 그 이유를 물어보면 엘사의 왕녀 수업때문이라는 둥, 성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둥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들 뿐이었다.

 

가장 기막힌 사건은 6년 전에 있었다.

 

그때 안나와 엘사의 부모님은 이웃나라에 잠시 방문할 계획이었다. 사방이 바다인 아렌델의 특성상 배를 타고 가야해서 항해사와 배를 준비한 상태였다. 왕복하는 데 1주일 정도, 머무는 것까지 생각하면 약 2주일 정도의 긴 여행일정이었다. 그때 안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2주간 부모님이 없다는 것에 대한 해방감 뿐이었다.

 

그러나 엘사는 달랐던 모양이다.

 

떠나기 며칠 전, 식사를 하던 도중에 엘사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꼭 가셔야 겠어요?"

 

부모님은 당황스런 얼굴로 엘사를 보았다. 안나도 정신없이 음식을 입으로 집어넣다가 툭 멈추었다.

 

한 나라의 왕과 왕비가 성을 비우고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2주일의 여행계획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걸 똑똑한 엘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왜 그녀가 이렇게 안절부절하며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바다가 심상치 않아요. 습도도, 풍향도 불규칙하다구요. 조만간 태풍이 불거에요. 부탁이에요. 안가면 안되요?"

 

왕은 그런 그녀의 걱정이 귀엽다는듯이 웃었다. 엘사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버지,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실 수 없어요? 자칫하다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오, 엘사. 우리 귀여운 딸.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튼튼한 배가 있고, 아렌델 항해사가 있는데 뭐가 그리 문제니?"

 

"하지만!"

 

"엘사. 괜찮단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란다. 그냥 식사나 맛있게 하자꾸나."

 

엘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문을 나서버렸다. 아마 또 방에 박힐 생각이겠지.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맛있는 초콜릿을 혼자 먹을수 있다는 생각에 빠졌다.

 

불행하게도 엘사가 옳았다.

 

2주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에 엘사는 즉시 사절을 보내 도착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돌아온 소식에 절망했다.

 

부모님은 도착조차 하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안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못해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거리를 2주동안 도착도 못했다고? 그녀의 머리속엔 이미 최악의 가정이 떠돌고 있었다. 안나는 덜덜 떨면서 엘사의 방을 찾았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안나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엘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 소식 들었어? 엄마랑 아빠가……."

 

"……."

 

"돌아 오시겠지? 그치? 분명 별일 아니겠지? 응?"

 

"……."

 

엘사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나는 문을 두드렸다.

 

"언니. 제발 말좀 해줘. 엄마랑 아빤 괜찮을 거라고. 응? 괜찮을 거잖아. 그치? 우리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리가 없잖아? 우린 행복할꺼잖아! 언니, 제발 말좀 해줘! 언닌 항상 옳았잖아! 엘사! 제발 말좀 해줘, 제발……."

 

안나는 문 앞에 주저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엘사의 방 앞에서 절규를 했다.

 

그러나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그 와중에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안했다는 것이다.

 

며칠 뒤, 왕과 왕비의 장례식이 열렸다. 안나는 검은색 장례식 가운을 뒤집어쓰고 장례식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안나는 슬픔에 빠진 채 복도를 비척거리며 걸었다. 하녀인 겔다가 안나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준비는 다 되셨나요?"

 

"네. 언니는 준비됬나요?"

 

그 말에 겔다는 난처하단 표정을 지었다. 안나는 고개를 갸웃 했다.

 

"저, 공주님. 엘사 공주님은 참석하지 않겠다고……."

 

"네?"

 

안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겔다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엘사 공주님께선 방에서 대기하시다가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안나는 겔다를 휙 밀치고는 엘사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엘사! 엘사! 미쳤어? 지금 장난하잔 거야? 장례식에 안오겠다고?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거야? 언니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그렇게나 사랑하던 언니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안나는 눈물을 흘리며 문을 두드렸다. 부모를 잃은 슬픔보다 엘사에 대한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나 착하던 그녀가 왜?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대답해 엘사! 뭐때문에 사람을 꺼리는 건데? 왜 문을 닫아두는 건데! 왜 나오질 않는거야! 나와! 나랑 얘기좀 해!"

 

그러나 엘사의 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은 그저 닫혀있을 뿐이었다. 안나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잡고 미친듯이 흔들어대며 문을 두들겼다.

 

"엘사! 엘사아! 이 문 열어! 어서 열으란-"

 

철컥

 

"어?"

 

문이 열렸다. 아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언제부터?

 

"……엘사?"

 

안나는 당혹감에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끼익, 하며 문이 조금 열렸고, 문틈 사이로 차디찬 바람이 불어왔다. 알수없는 한기에 안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순식간에 눈보라가 그녀에게 불어왔다. 안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안나는 문을 열었다. 여전히 찬 공기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먼지하나 없이 잘 정돈된 책상과 깔끔히 정리된 이불은 엘사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곳에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안나는 천천히 방 안을 거닐었다. 책상을 쓰다듬고, 책장에 손을 뻗었다. 기하학, 행정학, 윤리학, 법학, 수학, 물리학, 화학……. 정말 많이도 배웠구나. 안나는 풋 하고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침대에 이르러 안나는 침대에 앉았다. 방 한가운데로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6년 전, 부모님의 장례식 날. 처음으로 안나가 엘사의 방에 들어간 날. 그녀는 이 방의 한 가운데에서 엘사를 보았다.

 

천장에 밧줄을 매달고 샹들리에처럼 달려있는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우아하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장례식 날이라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기일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도 슬픈, 그러나 자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나는 그 광경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문득 발 밑에 떨어진 쪽지 하나가 보였다. 안나는 비척거리며 종이를 주웠다.

종이 위에는 엘사 특유의 부드러운 글씨체로 한 문장이 쓰여있었다.

 

"I'm sorry, Anna."

 

그 쪽지는 지금도 안나의 품속에 지니고 있다.

 

안나는 털썩하고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한기가 온 몸을 쑤셔댔다. 안나는 엘사가 덮던 이불을 품으로 껴안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언니, 어째서였어? 왜 날 버린거였어?"

 

아직도 안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안나는 21살이 되는 오늘, 엘사가 입었어야 했던 드레스를 자신이 입어야 했으며 엘사가 짊어야 했을 짐들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게 되었다.

 

아렌델의 여왕, 안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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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단편 2015. 7. 28. 11:05

오후 3시. 여자는 고개를 올려 멋들어지게 걸려있는 간판을 보았다. 방금 단듯이 하얀 간판에는 고풍스럽게 쓰여 진 검은 글자로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C·U·T. 단순하면서도 미용실의 모든 걸 나타내는 글자였다. 여자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유리문을 밀었다.

딸랑, 문에 달린 조그마한 종이 유리문을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대걸레로 바닥을 닦던 남자는 걸레질을 멈추고 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주색 셔츠, 검은색 청바지와 그 위에 두른 검은색 앞치마는 남자에게 잘 어울렸다. 대걸레에는 바닥에 빨간 염색약이라도 엎지른 걸까, 드문드문 붉은 얼룩이 보였다.

여자는 미용실을 처음 와보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나무로 지은 분위기의 미용실이었다. 조명도 환하게 하지 않고 약간 어둡게 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배어 나왔다. 미용실의 한쪽 벽에는 와인색 의자 세 개가 벽에 달린 거울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미용실 안에서는 차분한 피아노 음악이 들려왔다.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사랑의 인사의 끝부분이었다. 미용실 내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노래가 끝나자 멘트가 나오는걸 봐서는 라디오 방송인 모양이다.

미용실 안쪽으로 세련된 무늬의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그 밖으로 밀 수 있게 바퀴가 달린 검은색 플라스틱 바구니 통이 나와 있었다. 거기에는 여러 도구들이 꽂혀 있었다. 남자는 대걸레를 들고 커튼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대걸레가 없는 걸로 봐서 안쪽에 두고 온 모양이다.

"처음 오세요?"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빙긋 웃으면서 여자에게 다가왔다.

"코트 벗어주시겠어요?"

여자가 남자에게 등을 보이고 베이지색 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옷을 건네자 속의 하늘색 긴팔 셔츠가 드러났다. 남자는 뒤돌아서 옷장에 코트를 가지런히 건 뒤 자주색 가운을 꺼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가운을 입혀준 뒤 가운데 의자로 안내했다. 여자가 자리에 앉자 그 위로 깨끗한 흰색 컷트 보를 목에 걸었다. 여자가 보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빼내자 그녀의 잡티 없이 하얀 목덜미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새하얀 보 위로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여자는 쓰고 있던 안경을 거울 옆에 두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음, 조금 다듬어 주시구요, 염색도 해주세요."

"네. 어떤 색으로 해드릴까요?"

"어……빨간색으로요. 너무 진하게는 말구요."

남자는 커튼 앞에 있는 플라스틱 통을 끌고 돌아왔다. 통 아래쪽에 책자 하나를 펼쳐 보여주었다. 거기엔 머리카락이 한 뭉큼씩 염색되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가리킨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엷게 붉은색이 염색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여자는 안경을 벗어서 눈이 잘 안 보이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머리카락 뭉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걸로 해주세요."

남자는 책자를 다시 통 아래에 두고 분무기를 집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분무기로 적신 뒤, 남자는 가위를 꺼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조용히 들려오는 라디오 음악을 들었다. 사연을 듣고 사연곡이 있으면 사연곡을, 없으면 라디오 DJ가 적당한 음악을 선곡해서 틀어주는 형식이었다. 이번에 들려오는 음악은 위모레스크였다. 여자는 들려오는 멜로디를 콧소리로 따라 불렀다.

"내일 데이트라도 하시나 봐요."

남자가 정성스레 가위질을 하면서 물었다. 여자는 수줍게 네, 하고 대답을 했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하도 들떠 보이셔서요."

"네? 그래보이나요?"

여자가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여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카락들이 새하얀 보 위로 흩날렸다. 남자도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사귀기 시작했어요. 내일이 첫 데이트에요."

"오오, 축하드려요. 이거, 정말로 공들여서 손질해 드려야겠는데요?"

"네, 예쁘게 해주세요."

"네. 조금만 숙여 주시겠어요?"

여자가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머리카락 끝을 잡아서 올렸다. 한 손에 잡힐 듯한 목덜미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조그마하게 볼록 나온 목뼈가 보였다.

사각, 사각. 잔잔히 울리는 관악기의 소리와 머리카락을 자르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라디오의 위모레스크는 잔잔하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DJ가 종이를 집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사연은 좀 슬프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XX시 ㅁㅁ구에 사는 OOO입니다. 오늘이 저희 언니의 생일이라서 이렇게 사연을 보내봅니다. 저희 언니는 이 세상에는 없는,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연쇄살인의 피해자 중 한명입니다.

몇 달 전, 잠깐 외출을 하고 오겠다던 언니는 몇 시간이 지나 저녁 먹을 때가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워낙에 어른스러워서 저녁 먹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왔고, 만약에 먹고 들어온다면 연락을 항상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언니는 그 다음날이 지나서 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실종신고도 하고, 며칠 동안 언니가 가 있을만한 곳들을 찾아보았지만, 언니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2주 뒤,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찰은 언니의 이름을 말하면서 언니가 시체로 발견되었단 말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저는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전화기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자니 엄마가 와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제 언니의 이름을 말하자 경찰은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갑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갑은 언니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고 거기서 다시 울었습니다.

며칠 뒤, 수십 명의 기자들이 저희 집에 들어왔습니다. 언니의 소식은 금세 뉴스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뉴스에서 충격적인 걸 알았습니다. 언니의 목 윗부분이 없다는 걸. 부모님은 그 사실을 장례식 전까지도 숨겼습니다. 아마 제가 충격 받을까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뒤에도 2건의 머리가 없어지는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은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아우……무서워라. 게다가 이 동네고 말이죠."

"……."

"그러고 보니까 머리는 아직도 못 찾았다면서요?"

"……."

"어디다 모아두기라도 하는 걸까요."

"……."

"빨리 잡혀야 좀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텐데."

싹둑

"……저기요?"

대답이 없는 남자에게 여자는 순간 불안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아."

남자의 짧은 소리와 함께 사악, 하고 가윗날이 여자의 왼쪽 귀 위쪽을 베었다. 여자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가윗날에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여자의 귀로 피가 조금 흘렀다. 남자는 황급히 가위를 치우고 귀를 살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멍하니 있다가 그만! 많이 아프세요?"

"아니에요, 그렇게 아프진 않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뒤돌아봐서……."

"자자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소독약 가져올게요!"

남자는 당황하면서 커튼 뒤로 뛰어갔다. 커튼 뒤에서 마개를 여는 소리와 화장지를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남자가 커튼 뒤에서 뛰어왔다. 남자는 오른손에 화장지뭉치를 들고 있었다. 화장지는 액체에 젖어 있었는데, 그 위로 조그마한 거품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왼쪽 귀에 뭉치를 대고 꾹 눌렀다. 여자는 귀에서 조금 쓰린 고통을 느꼈다. 남자는 귀를 한참을 누르다가 떼었다. 다행히 피는 그쳐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부주의해서……."

"아뇨, 제가 잘못했는데요."

"밴드 붙일게요. 혹시 불편하세요?"

"딱 좋아요."

밴드를 귀에 붙이고 남자는 진정된 듯이 다시 가위질을 했다. 잘린 머리카락들은 묻어있던 피에 엉겨 붙어 보에 떨어졌다. 하얀 보에 스멀스멀 피가 퍼졌다.

얼마나 잘랐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안경을 펴서 씌워주고, 거울로 뒷머리를 보여주었다.

"이 정도 자르면 될까요?"

"네. 괜찮네요."

"그러면 염색 할게요."

남자는 바구니에서 플라스틱 받침대를 꺼내어 여자의 어깨에 걸쳤다. 남자는 장갑을 끼고 바구니에서 약통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컵에 적당량을 부어서 붓으로 섞었다. 컵 안의 색은 금세 붉은 색이 되었다. 붓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섞인 정도를 확인하더니 여자의 머리카락을 들어서 정성스레 약을 발랐다. 검은색 머리카락 위로 붉은 약품이 스며들었다. 남자는 염색을 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아까 무슨 말 하고 있었죠?"

"네? 어, 이 동네에 살인범 이야기요."

"아아, 그거.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4명이었나요?"

"아뇨, 아까 라디오 사연 들으니까 3명인 것 같던데요."

"그런가요? 요새 뉴스를 못 봐서."

붉은색 염색약 몇 방울이 보 위로 떨어졌다. 금 새하얀 천 위로 몇 개의 붉은 꽃이 피었다.

"돌아다니기 무서우시겠어요. 여성분이신데."

"제가 당하진 않겠죠. 설마."

"그런 생각은 위험해요.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데."

"에이, 그래도 저겠어요?"

여자는 깔깔 웃었다. 남자도 미소를 지었다.

몇 분 뒤, 여자의 머리에 염색약을 다 바른 남자는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비닐 모자를 꺼내어 여자에게 씌워주었다. 받침대를 빼내고 컷트 보까지 벗겨낸 뒤, 남자는 여자에게 패션잡지의 최신호를 건네주었다. 잡지의 표지에는 최근 유명한 모델이 관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건네준 패션잡지를 한참동안 읽었다. 내일 있을 데이트에 입을 옷을 참고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한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이 여자의 눈길을 끌었다.

갈색 코트, 베이지색 목도리, 검은색 면 티와 무릎을 살짝 덮는 검은 치마. 세련돼 보이면서도 그렇게 꾸민 것 같지도 않고, 뭣보다 집에 전부 있는 것들이다. 여자는 커튼 안쪽에 바구니를 밀어 넣고 카운터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남자에게 책을 펼쳐 보였다.

"오, 이거 예쁘네요. 내일 이렇게 입으시게요?"

"네. 괜찮죠?"

"그럼요. 아, 시간 됐네요."

여자는 남자에게 커튼 뒤로 안내되었다. 거기엔 검은색 가죽의자가 놓여있고, 그 뒤로 세면대와 샴푸, 린스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자리로 인도한 뒤, 수건을 여자의 목에 둘렀다.

여자가 목을 젖히자 남자는 여자가 쓰고 있던 비닐 모자를 벗겨내었다. 머리에서 붉은 염색약 한 줄기가 여자의 목덜미로 흘러나왔다. 남자는 화장지를 뜯어 여자의 새하얀 목덜미를 닦아냈다. 그 뒤 세면대 아래로 늘어진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세면대 위로 쓸어 올렸다.

남자가 수도꼭지를 열자 쏴아 하고 따뜻한 물이 수도꼭지에서 뿜어졌다. 뜨거운 기운이 여자의 머리 위로 느껴졌다. 남자는 약들의 겉만 씻어내려는 듯 찰박 찰박하고 가볍게 물을 끼얹기만 했다. 샴푸를 짜는 소리가 들린 뒤,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남자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남자는 가볍게, 또 부드럽게 여자의 머리카락을 비비고 두피를 마사지 해주었다. 한참을 샴푸거품을 낸 뒤, 남자는 다시 물을 틀었다.

샴푸거품을 씻어 내린 뒤, 남자는 여자의 머리 위에 있는 장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남자에게서 어라, 하는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 죄송한데 아까 수건을 다 써버려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여자는 목을 젖힌 채 의자에 누워있었다. 저 멀리에서 탱그랑거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에서는 음악방송이 끝나고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범인은 피해자의 경동맥을 날카로운 걸로 찔러 살해한 뒤, 톱과 같이 날카로운 흉기로 목을 잘라냈습니다. 그 뒤 피해자의 몸을 커다란 비닐봉투에 싸서 한강에 투기했습니다. 경찰은 앞선 3구의 사체가 모두 한강 하류에서 발견된 걸 생각해 한강에 투입인력을 증대시키기로 했습니다……."

여자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양한 상표의 샴푸와 린스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500ml들이쯤 되 보이는 유리병에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거의 다 써서 밑바닥에 약간만 남아있었다. 유리병에는 과산화수소수라고 적혀 있었다. 과산화수소수가 소독약으로 쓰인다는 걸 여자는 생각해냈다. 여자는 아까 귀를 눌렀던 화장지에 묻힌 액체가 저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런 미용실에서 저런 약이 왜 필요한 걸까.

"얼룩 같은 거 지울 때 좋아요."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아……염색약 같은거요?"

"네, 그리고 가끔 베이거나 하면 피 있잖아요. 그런 것도 잘 지워지구요. 가끔 소독할 때도 있구요. 제가 좀 덤벙대서요."

"방금 처럼요?"

"하하……죄송합니다."

남자는 장에 수건을 넣은 뒤, 한 장을 빼서 여자의 머리를 감싸고 부드럽게 비볐다. 물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린 뒤, 여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넣고 스위치를 올리자 뜨거운 바람이 뿜어졌다. 남자의 손길에 따라 여자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다 됐습니다."

남자는 헤어드라이어를 끄면서 말했다. 여자는 거울 옆에 뒀던 안경을 쓰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검은색 머리칼에 잘 염색된 붉은색 빛이 감돌았다. 몇 번 머리카락을 쓸어본 뒤, 여자는 말했다.

"저기, 혹시 이쪽에 머리도 잘라주실 수 있나요?"

여자는 뒷머리 쪽에 삐죽 나온 머리카락을 잡으면서 말했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남자는 피가 번져있는 가위를 집어 들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오늘 저녁 9시 반, 한강에서 머리가 없는 시체 두 구가 발견되어……"

딸랑

"어서 오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혹시 머리 잘라주실 수 있나요?"

남자는 빙긋 웃었다.

"그럼요. 그게 제 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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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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