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모음 3

카테고리 없음 2023. 12. 19. 16:42

드로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종종 있습니다. 혹시 상회에서 자신들을 시험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분들이요. 특히 상회를 꾸리는 분들이 더더욱 그러시죠.”

얼굴이 새빨개진 클레어를 변명해주듯 드로민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게다가 부인께서는 어린 나이시지 않습니까. 더욱 얕잡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죠. 의심하시는 게 당연한겁니다.”
“……미안하게 됐네. 내 괜한 의심을 했어.”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클레어에게 황급히 손사레를 치며 드로민은 웃었습니다.

“아닙니다, 부인. 정말 좋은 덕목이죠. 의심은 신뢰를 위한 첫걸음이니까요. 저희의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길 바랍니다.”
“미안하네. 결혼식의 피로가 남아있던 모양이야. 부인이 날카로웠던 것은 나도 사과하지.”
“아뇨, 아닙니다. 하하하, 자꾸 이러시면 제가 더 곤란합니다. 자, 다 왔으니 일 이야기를 하시지요. 저곳입니다.”

드로민이 웃으며 한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회반죽을 칠해 회색의 건물엔 이곳저곳 검댕이 묻어 얼룩져 보였습니다. 온갖 자재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모습이 더더욱 지저분해 보여 얼핏 보기엔 창고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검은색 옷을 입은 작은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마치 로브처럼 생긴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브라고 하기엔 짧고, 앞섬에 주머니가 달린 것이 굉장히 특이한 차림새였습니다. 추운 듯, 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빈민가 아이들 같았습니다.

바지 역시 창백한 푸른색에 두꺼운 재질로 보였습니다. 공사 인부들이 입는 천으로 만들어진 바지가 이곳저곳 찢어져 안감이 보여 낡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입에는 짧은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모락모락 뿌연 연기가 쉼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레어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까까지의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충격이었습니다.

네, 그것은 그녀가 전생에서 ‘후드티’라고 부르는 옷과 ‘청바지’라고 부르는 바지였으니까요.

그 여성은 드로민과 뒤의 셋을 보더니 부리나케 담배를 끄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피해 건물로 쏙 들어갔습니다.

“바, 방금 전에 그……! 방금! 그! 저기! 저기에 있던!”

클레어는 놀란 듯 손가락으로 방금 그곳을 가리켰습니다. 벌벌 떠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아슈팔트와 시니아가 당황하며 혹시 몰라 그녀를 받쳐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마님!”
“아는 사람입니까?! 진정해요!”
“……아니, 아니. 미안해요, 애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드로민은 안절부절하며 클레어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직원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데려올까요?”
“아니. 괜찮네. 내 자꾸 미안하네.”
“하지만, 마님…….”
“아냐.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내가 뭔가 좀…….”

거의 울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니아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클레어는 입술에 힘을 주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이세계인’이 또 있을 가능성을 염두해두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교계를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만 그래도 해외까지 손을 뻗은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국 내에서의 활동은 대부분 살펴봤을텐데. 

클레어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뇨, 잘못봤겠죠. 그런 복식이 흔하지 않을 뿐, 어딘가에선 있을 수도 있죠.

그리고 설령 이세계인이더라도 뭐 어떤가요. 진정이 되니 머리가 냉정해졌습니다. 네, 그저 동향사람일 뿐이죠.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냥 놀랐을 뿐입니다.

네. 그 뿐이죠.

클레어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미안하네. 아까 말대로 결혼식이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야. 괜찮으니 마저 들어가도록 하지.”



응접실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있었습니다. 시니아는 클레어의 뒤에 자리하고, 혹시나 싶어 클레어는 껴안을 수 있는 쿠션이 주어졌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헤어 드라이어가 나무상자에 얹혀졌습니다. 드로민은 작은 양피지를 꺼내 잉크병과 같이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헤어 드라이어 말이다만.”

아슈팔트는 헤어 드라이어를 보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주 잘 만들어졌네. 사용해보니 아주 훌륭한 성능이야.”
“그럼 공작님께서 사용하신겁니까?”
“아니지. 나야 수건으로 몇 번 털면 끝나지 않겠나.”

그리고는 클레어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따뜻한 것을 마신 덕인지 손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부인이 매일 아침 이용하고 있네. 그렇지, 시니아?”
“네! 덕분에 제가 많이 편해졌어요! 머리 말리는 데 2시간 씩 걸리던 게 30분이면 뽀송뽀송하게 마른다구요!”
“해서, 여기. 개선했으면 하는 걸 적어왔네.”

시니아는 가방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내 드로민에게 건넸습니다. 드로민은 안경을 끼고 서류를 살폈습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한참이나 양피지를 넘기고는,

“꽤나 세세하군요.”

하고는 안경을 벗었습니다.

“저희 연구원이랑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만……아까 그 직원이라서, 혹시 불편하시다면…….”
“꼭 부탁하네!”

테이블을 넘어설 기세로 소리친 클레어 때문에 드로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짓자 그제서야 클레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부탁하지. 조금 신경쓰이는 게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드로민이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가자 아슈팔트가 클레어의 손을 잡았습니다. 걱정하는 표정으로 손등을 쓸어주니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클레어, 괜찮은겁니까? 아까부터 왜 이렇게 쫓기는 것 같이 그래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오늘따라 좀…….”
“그 직원이 아는 사람이에요?”
“그게……그러니까…….”

우물쭈물하던 클레어는 시니아가 홍차를 건네주니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미지근해진 홍차가 속을 데우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제가 사실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요.”
“그게 무슨…….”
“여기서 말하기는 길어요. 오늘 꼭 말씀드릴게요. 걱정말아요. 아마 걱정하시는 일은 아닐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시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마, 마님! 그러면 설마……!”
“……가능성의 이야기야. 너도 이따가 같이 와주렴.”
“둘만 아는 이야기라니, 조금 섭섭하네요.”
“정말 미안해요. 자, 기분 풀어요.”

클레어가 웃으며 손을 도닥이니 베시시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응접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문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드로민 부장과 들어온 것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습니다. 검은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어색하다는 듯 어물쩡거리며 클레어의 앞에 섰습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엔 옅은 피곤함이 있었습니다. 검은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그것을 뒷목 근처에서 헐렁하게 묶은 게 꾸미는 데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예법에 익숙치 않은 듯, 구부정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습니다.

“임예지입니다. 임이 성입니다.”
“이 친구가 헤어 드라이어를 만든 직원입니다. 이름이 특이하죠? 동방에서 와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드로민은 클레어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아까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드로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클레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인……?”
“마님?”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다른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클레어는 허우적 거리듯이 예지에게 다가와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주물떡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붓, 저기…….”
“클레어! 이게 무슨!”

허겁지겁 일어난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어깨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예, 예, 예지……! 예지야! 예지, 예지에요! 예지라고! 예, 예, 예, 예, 예지가……! 예, 예지가!”
“네……전데여어…….”
“예지야아! 예지가, 예지야! 예지야아아!”

울부짖던 클레어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부리나케 그녀를 붙잡는 아슈팔트의 얼굴만이 기억에 남는 마지막이었습니다.


클레어는 눈을 천천히 떴습니다. 낯선 천장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니 후드득, 하고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누워서 울었던 모양입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자니 바깥이 유난히도 시끄러웠습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클레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방을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고성을 지르며 칼을 뽑아 든 아슈팔트와, 그에게 매달린 장정들과 시니아, 그리고 그 앞에서 벌벌 떨며 울고있는 예지가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누구냐고 물었잖느냐!”
“이, 이, 이, 임예지인데, 요……!”
“그거 말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빨리 설명 드리지 못해?! 이러다 진짜로 죽겠어!”
“아무, 아므, 힉, 것도, 히끅, 안, 했는데요……!”

난장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클레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쓰러진 본인의 탓이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죠.

때마침 시니아가 클레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 마님! 제발 도와주세요!”
“클레어?! 클레어!”

아슈팔트는 칼을 놓고는 장정들을 뿌리치고 클레어에게 달려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미안해요. 다들 진정하고. 정말로 미안해요.”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슈팔트의 눈을 보다가 예지에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예지는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잠시 후, 바지 밑으로 축축한 물웅덩이가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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