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검 마두르크.

현존하는 유일한 성검.

태양빛에 달궈 달빛에 식혀낸 그 칼날은 한번 베어 통나무를 자르고, 일곱 대사제의 축복을 받은 그 검자루는 잡기만 해도 모든 질병을 없앤다고 합니다. 

오래전, 대륙을 덮친 화이트 드래곤 마두르크의 목을 베어냈기에 붙은 이 검의 이름이 그 위광을 나타내죠.

선택받지 못한 자가 잡으면 온 몸의 기력이 빠져나가 세 번 휘두르기 전에 쓰러진다기에 현재는 왕가에서 보관중인 물건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같은 정도의 마력량을 띄는 물건을,

“……내 머리 말리는 데 썼다고?”
“……하루에 30분씩……?”
“그, 서, 선생님이라면 아실거에요! 사, 사, 상식적으로 드라이기를 누가, 코, 콘센트 없이 쓸 수 있어요!”

클레어는 여러가지로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성검으로 머리를 말려온 것 같은 느낌도 그렇지만, 그걸 태연하게 써온 시니아는 또 뭔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지야, 도대체 뭘 만든거니…….”

우물쭈물하던 예지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드라이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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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딱, 똑, 딱.

방 안의 시계바늘은 열심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슈팔트는 찻잔을 채우려고 주전자를 들었다가, 이미 텅 비어버린 것을 깨닫고는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하지만 전하.”
“클레어. 우린 오늘 결혼했어요. 생각할 일이라면 넘쳐 흐릅니다. 우리의 신혼을 골치아프게 시작하고 싶진 않아요.”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두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것도 더 많이 듣고 싶소. 지금의 당신도, 전생의 당신도.”
“……네, 전하.”

한창 달달한 분위기를 풍기던 두 부부는 우울하게 자신들을 보던 예지를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놓았습니다.

“그, 옷은 걱정말게. 내일까지 세탁해서 돌려줄테니.”
“아, 아뇨……안그러셔도…….”
“내가 미안해서 그러네. 아, 그렇지. 아예 내일 한번 방문을 하는 건 어떤가?”

클레어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방긋 웃으며 예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 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궁금하고.”
“아, 그, 저…….”

한참이나 망설이던 예지는 마지못한 듯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작디 작은 대답을 들은 클레어는 부드럽게 예지의 머리를 쓸어내렸습니다.

“그럼, 내일 마차를 보내줄게. 어디로 보내면 될까?”
“네? 어, 어……그러면 여기 공방으로…….”
“그럼 점심시간에 보낼게. 같이 점심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알았지?”
“어, 그, 그게……네…….”
“그럼, 시니아. 준비해줘라.”
“알겠습니다, 전하.”

자리에서 일어난 아슈팔트는 예지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습니다. 히이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예지에게서 흘렀지만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일어난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부디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겠어.”
“어, 네, 어……그, 어……겨, 결혼, 축하드려요……전하…….”

시뻘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가까이 있던 아슈팔트를 제외하면 듣지도 못했겠지요.

“……고맙네. 내 반드시 자네의 선생님은 행복하게 해줄테니 걱정말고.”
“네…….”

공방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떨어져 어두웠습니다. 그 사이 다른 직원들은 퇴근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방 역시 불이 여기저기 꺼진 것이 을씨년스러워 클레어는 겉옷을 추켜 올렸습니다.

“어두운 곳이니 바래다 주겠네.”
“아, 저는 저어기 기숙사에 살아서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예지를 클레어는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어, 서, 선생님…….”
“예지야. 꼭 내일 보자. 하고싶은 얘기가 정말 많아.”
“……네에…….”
“조심히 가고. 내일 보자!”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클레어와 아슈팔트 뒤로 시니아가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예지는 허겁지겁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마차에 올라타려는 클레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아봤습니다. 가는 모습을 보려던 듯 오도카니 서있던 예지는 흠칫, 몸을 세웠습니다.

“근데 예지야. 너 담배피니?”
“……아, 저, 그게에…….”
“몸에 안좋으니까 끊고!”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폴짝 마차에 올라타 아슈팔트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그 뒤로 올라탄 시니아가 문을 닫자마자 마차는 쌩 하고 달려나갔습니다.

마차의 흔들림을 온 몸으로 받자 피로감이 단숨에 몰려왔습니다. 아슈팔트와 시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어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하루에 이렇게까지 여러 일들을 겪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수없이도 일어났던 일이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는 꽤나 얌전히 지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식도 했고, 자신의 품평도 올라갔고. 무엇보다도 오래 전의 제자를 만났으니까요.

창문에 머리를 기대니 서늘한 바깥의 온도가 유리를 넘어 이마를 식혀주었습니다. 클레어는 눈을 감고 예지와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임예지.

딱히 특별할 것 이라고는 없는 아이였습니다. 내성적이라면 뭐, 내성적이었습니다. 친구들도 있고, 학교 성적도 평범했습니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노래듣는 걸 좋아하고, 가족들이랑 얘기는 많이 안하지만 사이는 좋아보였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여러 학생 중 하나. 딱 그 정도로 좋아했고, 딱 그 정도의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 일가족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죠.

어디 놀러간댔던가, 아니면 잠깐 외출이었던가. 가족끼리 외식하러 간 걸지도 모르죠.

장례식장에서는 울고있는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 친척들이 모여서 조의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윤주 역시 절을 하고, 꽃을 두었습니다. 

어색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의 죽음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던 나이였고, 그렇게 친하냐면 그건 또 아니니까요.

그러나 육개장을 한 숟가락 뜨는 순간 터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담당하던, 같이 저녁식사도 하던 아이가 하룻날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지의 꿈이 뭐였던가요? 좋아하는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을까요? 가고싶은 대학교는 어디였을까요? 그 아이의 책장에 무슨 책이 꽂혀있었죠? 

조금 더 자세히 알아둘걸. 하루만, 단 하루만 더 이야기 할걸.

그녀는 결국 육개장을 삼키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났습니다.

예지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윤주는 취직도 하고, 자취도 하며 평범하게 지냈습니다. 부모님과 여행도 가고, 친구들이랑 맥주 한 잔도 하고, 직장에선 혼나기도 하는 바쁜 일상속에 예지에 대한 기억은 차츰 사라져갔습니다.

퇴근 하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간단히 군것질 할 것을 찾던 윤주는 간편식품 코너에서 발을 멈췄습니다. 인스턴트 육개장을 보니 불현듯 예지 생각이 나던 날이었습니다. 기분이 괜히 착잡해져 육개장과 소주를 사서 집으로 가던 윤주는 그렇게, 자신의 제자와 같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클레어.”

어느덧 잠에서 깬 아슈팔트가 천천히 클레어의 어깨를 감싸안았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눈가를 손으로 훔쳤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아뇨, 그냥…….”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눈가를 닦아주었습니다. 마차 안의 공기때문에 발그레해진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니 아직 물기가 남은 탓에 촉촉함이 입술에 남았습니다.

“울지 마요, 내 사랑. 좋은 날이잖습니까.”
“……후훗, 네. 좋은 날이에요.”

클레어는 밝게 웃으며 아슈팔트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그는 그대로 클레어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습니다. 마치 아기를 달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클레어는 어쩐지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쩌면 19살이 아니라 9살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중, 아슈팔트의 손이 멈췄습니다.

“그러고보니 약속을 어겼군요.”

클레어는 얼굴을 슬쩍 들어 아슈팔트를 올려보았습니다. 그는 난처하단 듯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제 3 황녀전하 말입니다.”
“리리아요?”
“아까 결혼식 전에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드렸는데.”

클레어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슈팔트를 더욱 끌어 안았습니다.

“괜찮아요. 기뻐서 울었으니까.”
“……결혼생활에 겁먹었나 하고 무서웠습니다.”
“애시가 있고 시니아가 있는데 무서울 게 어딨어요.”

클레어는 아슈팔트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거칠지만 정돈된 흑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지럽혔습니다. 그것이 조금 부끄러워진 아슈팔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버릇될 것 같군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 했습니다. 아슈팔트는 세차게 고개를 돌리고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 모든걸 실눈뜨고 보던 시니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차마 일어났다고 얘기하지도 못한 채, 신혼부부의 달달한 기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언제 도착하려나.’

덜커덩, 덜커덩.

숨막힐 정도로 애정행각을 펼치는 신혼부부와, 숨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는 시녀를 싣고, 마차는 어둠속을 하염없이 달려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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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4

카테고리 없음 2023. 12. 21. 11:52

응접실에는 네명이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있었습니다. 아직도 적대적인 시선을 뿌리는 아슈팔트, 그런 그를 달래주고 있는 클레어와 시니아, 그리고 그 중심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예지.

예지는 펑퍼짐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가죽옷을 맨몸에 입어서인지 불편한 듯 몸을 자꾸 뒤척였습니다. 한참이나 그런 모습을 보던 아슈팔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세계의……지구? 란 곳인 거죠.”
“네. 저와 예지는 거기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리고……과외……? 가정교사……같은…….”
“고 1때……수학 선생님이셨어요.”
“고 1……? 처음 듣는 단어인데……. 그……당신은……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죠. 작년이니까 스물 일곱이에요.”
“그리고 그, 임 아가씨……?”
“이름으로 부르셔도…….”
“그래, 예지. 5년 전에, 교통? 사고로…….”
“네. 5년 전이랑 하나도 안바뀌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음……그럼 지금은 20살이겠네?”
“……네.”

가만히 설명을 듣던 아슈팔트는 테이블 위의 홍차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지는 그 모습에도 흠칫 놀란 듯 힉, 하는 숨소리를 내었습니다. 아슈팔트는 그런 애처로운 모습에 손을 거두었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예지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까는……미안하다. 내가 조금 정신이……어떻게 됐었나 보다.”
“네에……괜찮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예지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습니다. 아직도 겁에 질린 듯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슈팔트는 답답했는지 목의 단추를 몇 개 풀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조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어른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실망하셨나요……?”

클레어는 고개를 살며시 돌렸습니다. 그러나 아슈팔트는 그녀의 손을 꽈악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습니다.

“그럴 리 있습니까.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인걸.”
“애시…….”
“그래도 최소한 당신한테는 떳떳할 수 있겠군요. 10살이나 어린 신부라 얼마나 눈치를 받았는데요.”
“……당신도 참.”

그런 그들의 애정행각을 감격에 젖어 바라보던 시니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두 부부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테이블만 보던 예지가 다시금 움찔 하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아슈팔트는 황급히 클레어에게서 떨어지며 헛기침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사과하고 싶군.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말해도 좋네.”
“……아뇨, 딱히…….”
“아냐, 예지야.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봐. 선생님이 다 해줄게.”
“진짜로 없는데…….”
“걱정말고! 선생님 돈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슈팔트가 보기엔 도저히 18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듣고 있는 예지가 20살이란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구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꼭이다? 선생님이랑 약속한거야?”
“네에…….”

예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에 클레어는 빙긋 웃었습니다. 마치 확인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여전히 놓여있던 헤어 드라이어에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음. 헤어 드라이어를 만든 게 예지라고?”
“제, 제가 다 한건 아니고!”

허겁지겁 손을 휘젓던 예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그냥 조정만……원래는 과장님이…….”
“그래도 자네가 만든 것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네…….”

아슈팔트는 홍차에 다시 손을 뻗었습니다. 힉, 하는 예지의 숨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홍차잔을 집으니 완전히 식어버린 찻잔의 온도가 차가웠습니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서류뭉치를 테이블 위로 건넸습니다.

“헤어 드라이어의 개선점이네. 부디 자네가 읽어줬으면 좋겠군.”
“드라이기……그거, 혹시 사용해보셨나요?”
“네. 제가 매일 아침 마님의 머리 정돈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시니아가 부족해진 홍차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귀족끼리라면 발언할 기회가 없지만, 예지가 암만 봐도 작위를 가지진 않아보였습니다.

사실 그녀로서는 내심 예지를 깔보고 있기도 합니다. 어리버리한 모습도 그렇고, 예절도 뭣도 없는 그저 평민 나부랭이 아닌가요. 이래뵈도 시니아, 그녀는 나름 남작가의 차녀입니다.

그럼에도 시니아는 웃음을 띄었습니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의 오랜 지인이니 예의를 지켜야죠. 식어버린 예지의 찻잔에도 홍차를 따라주었습니다.

“덕분에 매일 아침 힘들지가 않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뇨, 아니에요……아, 고맙습니다.”

예지는 뜨거운 홍차를 받자마자 홀짝였습니다. 뜨거운지 인상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서류 뭉치를 집어 살펴봤습니다.

팔랑, 팔랑.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로 서류를 한참이나 보던 그녀는 그것을 무릎에 두고 헤어 드라이어를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뽀각, 하고 그것을 열었습니다.

안쪽에는 손톱만한 수정과 여러 기호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서류와 비교해가며 보던 예지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다시 한 번 헤어 드라이어를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헤어 드라이어를 위로 올려 무언가를 찾는 듯이 보였습니다.

서류도 뒤척여보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저기……마선은 어디있나요?”
“마선이요?”
“네……그, 아마 이 정도 되는 걸텐데…….”

예지는 손을 자신의 어깨만큼 벌렸습니다. 시니아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습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만.”
“……네?”

예지는 눈을 껌뻑껌뻑이더니 되물었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썼어요?”
“그, 여기에 이렇게 마력을 넣어서…….”

시니아는 헤어 드라이어의 수정부에 손을 대고는 마력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응접실 안에 희미한 푸른 빛이 퍼져나갔습니다. 후웅, 하는 바람소리가 헤어 드라이어에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렇게요.”

그 모습을 보던 예지는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왠지 그 모습이 머쓱해진 시니아는 흘려보내던 마력을 멈추고 헤어 드라이어를 내려놓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예지는 입가에서 침이 흐를 뻔 한 걸 닦았습니다.

“뭘, 뭇, 어, 왜, 어?”
“……저기……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시니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예지는 그 손을 뒤집어서 살펴봤습니다. 굳은살이 드문드문 박힌 손이 부끄러워 얼른 손을 빼내니 예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혹시 출마도기나……?”
“네……?”

잠시만요,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예지는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잠시후, 그녀는 몸뚱이만한 장치를 수레로 밀며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복잡한 장치였습니다. 여기저기에 스크롤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마석들이 무지개빛으로 빛나며, 빨갛고 파란 단추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었습니다.

예지는 거기서 검은 선으로 보이는 것을 헤어 드라이어에 연결하고는 빨간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아까와 같은 바람소리가 헤어 드라이어에서 들려왔습니다. 그것도 잠시, 곧 가져온 장치에서 요란한 빛과 소음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에 그 방에 있던 모두는 귀를 틀어막아야 했습니다.

“꺄아아악!”
“예지야! 예지야!”
“그만! 이게 무슨 소리야!”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아슈팔트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조차 묻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지는 인상을 조금 찡그릴 뿐, 한참이나 장치와 헤어 드라이어를 바라보다가 단추를 눌렀습니다. 장치는 한참이나 비명소리같은 소음을 내다가 멈췄습니다.

“이게 원래 쓰는 방법인데요…….”
“…….”

귀가 얼얼한 세 사람은 작은 예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혹시 집에……하네스……없으세요……?”
“하……? 뭐……?”
“어……민간 주택 건설법에 따르면 최소한……방마다 하나씩은 있으셔야되는데……근데, 최근에 나온 법이라서……없으실수도…….”

예지는 깃펜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개선 사항이 써진 서류의 뒷면에 그림 하나를 그렸습니다. 커다란 동그라미와 그 안에 작은 동그라미 두 개가 나란히 그려졌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세 사람에게 보여줬습니다.

“이런 건데요…….”
“……아니, 본 적 없다만.”

아슈팔트는 아직도 멍멍한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클레어, 아니, 윤주는 저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콘센트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습니다.

“저거, 어디서 본건데?”

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거, 그 엘리야에서 봤어요. 전하, 그 왕도에 커다란 장신구점 있잖아요?”
“아하, 예물을 맞췄던 곳 말이군.”

아슈팔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확실히 엄청난 곳이었지. 한밤중인데도 대낮처럼 환하고, 겨울철인데도 장작을 어찌나 떼웠는지 한여름처럼 후덥지근 했어. 내온 음료수에는 값비싼 얼음을 얼마나 넣었는지 이가 시려울 정도였고.”
“엘리야, 요…….”

예지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지만, 원체 표정이 어두운 터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아무튼……이걸 쓰려면, 그, 하네스 라는 곳에, 이걸 꽂아서 써야 되는데요…….”
“진짜로 콘센트였구나?” 
“콘……?”

알 수 없는 단어에 아슈팔트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오늘만 해도 도대체 얼마나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지는 건가요. 그러나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클레어는 빙긋 웃었습니다.

“내가 나중에 말해줄게요, 애시. 아무튼. 그게 있어야 이 헤어 드라이어가 동작을 하는건데. 그렇지?”
“네, 네. 근데, 그, 저…….”
“시니아입니다.”
“아, 네. 시니아 씨……? 님……? 은 그걸 맨손으로 사용하셔서…….”
“그거라면 나도 사용한 적이 있다만.”

아슈팔트는 오기 전에 자신이 사용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시니아와 마찬가지로 헤어 드라이어를 작동시켰습니다. 

“자, 이렇게.”
“……그, 전하……그렇게 막 쓰시면…….”

우물쭈물하며 예지가 말리려고 할 때, 헤어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바람이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응? 이, 이게 왜……?”
“어, 얼른 내려놔주세요, 전하……!”

아슈팔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있던 팔이 덜덜 떨리자 그는 그것을 탁자에 뿌리치듯 내려놓았습니다.

“괘, 괜찮으세요……?”
“애시, 괜찮아요?”
“전하! 세상에!”

픽 하고 그는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것을 받치듯 클레어가 두 손으로 어깨를 잡았고, 시니아가 손부채질을 해줬습니다.

“……아까는 잘만 됐는데……?”
“잠깐이라면 괜찮으실 수는 있어요……그리고 평소에 단련도 하셨고…….”

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헤어 드라이어를 집어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어, 이쪽에 보이시는 게 발열 마도에요. 그리고, 이쪽이 송풍 마석인데, 그리고 어……이게 보호 마력로고…….”
“……결론만 말해주게.” 

파랗게 된 안색으로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어깨에 기댄 채 손을 내저었습니다. 예지는 허겁지겁 손가락으로 접어가며 무언가를 암산하고는 말했습니다.

“어, 어, 마력 송출량은……성검이랑 비슷할거에요…….”

방 안에 침묵이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한 순간, 시니아에게로 향했습니다.

시니아는 두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된거죠…….”
“……그러게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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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3

카테고리 없음 2023. 12. 19. 16:42

드로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종종 있습니다. 혹시 상회에서 자신들을 시험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분들이요. 특히 상회를 꾸리는 분들이 더더욱 그러시죠.”

얼굴이 새빨개진 클레어를 변명해주듯 드로민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게다가 부인께서는 어린 나이시지 않습니까. 더욱 얕잡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죠. 의심하시는 게 당연한겁니다.”
“……미안하게 됐네. 내 괜한 의심을 했어.”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클레어에게 황급히 손사레를 치며 드로민은 웃었습니다.

“아닙니다, 부인. 정말 좋은 덕목이죠. 의심은 신뢰를 위한 첫걸음이니까요. 저희의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길 바랍니다.”
“미안하네. 결혼식의 피로가 남아있던 모양이야. 부인이 날카로웠던 것은 나도 사과하지.”
“아뇨, 아닙니다. 하하하, 자꾸 이러시면 제가 더 곤란합니다. 자, 다 왔으니 일 이야기를 하시지요. 저곳입니다.”

드로민이 웃으며 한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회반죽을 칠해 회색의 건물엔 이곳저곳 검댕이 묻어 얼룩져 보였습니다. 온갖 자재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모습이 더더욱 지저분해 보여 얼핏 보기엔 창고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검은색 옷을 입은 작은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마치 로브처럼 생긴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브라고 하기엔 짧고, 앞섬에 주머니가 달린 것이 굉장히 특이한 차림새였습니다. 추운 듯, 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빈민가 아이들 같았습니다.

바지 역시 창백한 푸른색에 두꺼운 재질로 보였습니다. 공사 인부들이 입는 천으로 만들어진 바지가 이곳저곳 찢어져 안감이 보여 낡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입에는 짧은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모락모락 뿌연 연기가 쉼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레어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까까지의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충격이었습니다.

네, 그것은 그녀가 전생에서 ‘후드티’라고 부르는 옷과 ‘청바지’라고 부르는 바지였으니까요.

그 여성은 드로민과 뒤의 셋을 보더니 부리나케 담배를 끄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피해 건물로 쏙 들어갔습니다.

“바, 방금 전에 그……! 방금! 그! 저기! 저기에 있던!”

클레어는 놀란 듯 손가락으로 방금 그곳을 가리켰습니다. 벌벌 떠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아슈팔트와 시니아가 당황하며 혹시 몰라 그녀를 받쳐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마님!”
“아는 사람입니까?! 진정해요!”
“……아니, 아니. 미안해요, 애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드로민은 안절부절하며 클레어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직원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데려올까요?”
“아니. 괜찮네. 내 자꾸 미안하네.”
“하지만, 마님…….”
“아냐.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내가 뭔가 좀…….”

거의 울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니아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클레어는 입술에 힘을 주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이세계인’이 또 있을 가능성을 염두해두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교계를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만 그래도 해외까지 손을 뻗은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국 내에서의 활동은 대부분 살펴봤을텐데. 

클레어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뇨, 잘못봤겠죠. 그런 복식이 흔하지 않을 뿐, 어딘가에선 있을 수도 있죠.

그리고 설령 이세계인이더라도 뭐 어떤가요. 진정이 되니 머리가 냉정해졌습니다. 네, 그저 동향사람일 뿐이죠.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냥 놀랐을 뿐입니다.

네. 그 뿐이죠.

클레어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미안하네. 아까 말대로 결혼식이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야. 괜찮으니 마저 들어가도록 하지.”



응접실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있었습니다. 시니아는 클레어의 뒤에 자리하고, 혹시나 싶어 클레어는 껴안을 수 있는 쿠션이 주어졌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헤어 드라이어가 나무상자에 얹혀졌습니다. 드로민은 작은 양피지를 꺼내 잉크병과 같이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헤어 드라이어 말이다만.”

아슈팔트는 헤어 드라이어를 보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주 잘 만들어졌네. 사용해보니 아주 훌륭한 성능이야.”
“그럼 공작님께서 사용하신겁니까?”
“아니지. 나야 수건으로 몇 번 털면 끝나지 않겠나.”

그리고는 클레어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따뜻한 것을 마신 덕인지 손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부인이 매일 아침 이용하고 있네. 그렇지, 시니아?”
“네! 덕분에 제가 많이 편해졌어요! 머리 말리는 데 2시간 씩 걸리던 게 30분이면 뽀송뽀송하게 마른다구요!”
“해서, 여기. 개선했으면 하는 걸 적어왔네.”

시니아는 가방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내 드로민에게 건넸습니다. 드로민은 안경을 끼고 서류를 살폈습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한참이나 양피지를 넘기고는,

“꽤나 세세하군요.”

하고는 안경을 벗었습니다.

“저희 연구원이랑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만……아까 그 직원이라서, 혹시 불편하시다면…….”
“꼭 부탁하네!”

테이블을 넘어설 기세로 소리친 클레어 때문에 드로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짓자 그제서야 클레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부탁하지. 조금 신경쓰이는 게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드로민이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가자 아슈팔트가 클레어의 손을 잡았습니다. 걱정하는 표정으로 손등을 쓸어주니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클레어, 괜찮은겁니까? 아까부터 왜 이렇게 쫓기는 것 같이 그래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오늘따라 좀…….”
“그 직원이 아는 사람이에요?”
“그게……그러니까…….”

우물쭈물하던 클레어는 시니아가 홍차를 건네주니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미지근해진 홍차가 속을 데우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제가 사실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요.”
“그게 무슨…….”
“여기서 말하기는 길어요. 오늘 꼭 말씀드릴게요. 걱정말아요. 아마 걱정하시는 일은 아닐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시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마, 마님! 그러면 설마……!”
“……가능성의 이야기야. 너도 이따가 같이 와주렴.”
“둘만 아는 이야기라니, 조금 섭섭하네요.”
“정말 미안해요. 자, 기분 풀어요.”

클레어가 웃으며 손을 도닥이니 베시시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응접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문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드로민 부장과 들어온 것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습니다. 검은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어색하다는 듯 어물쩡거리며 클레어의 앞에 섰습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엔 옅은 피곤함이 있었습니다. 검은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그것을 뒷목 근처에서 헐렁하게 묶은 게 꾸미는 데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예법에 익숙치 않은 듯, 구부정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습니다.

“임예지입니다. 임이 성입니다.”
“이 친구가 헤어 드라이어를 만든 직원입니다. 이름이 특이하죠? 동방에서 와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드로민은 클레어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아까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드로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클레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인……?”
“마님?”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다른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클레어는 허우적 거리듯이 예지에게 다가와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주물떡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붓, 저기…….”
“클레어! 이게 무슨!”

허겁지겁 일어난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어깨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예, 예, 예지……! 예지야! 예지, 예지에요! 예지라고! 예, 예, 예, 예, 예지가……! 예, 예지가!”
“네……전데여어…….”
“예지야아! 예지가, 예지야! 예지야아아!”

울부짖던 클레어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부리나케 그녀를 붙잡는 아슈팔트의 얼굴만이 기억에 남는 마지막이었습니다.


클레어는 눈을 천천히 떴습니다. 낯선 천장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니 후드득, 하고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누워서 울었던 모양입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자니 바깥이 유난히도 시끄러웠습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클레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방을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고성을 지르며 칼을 뽑아 든 아슈팔트와, 그에게 매달린 장정들과 시니아, 그리고 그 앞에서 벌벌 떨며 울고있는 예지가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누구냐고 물었잖느냐!”
“이, 이, 이, 임예지인데, 요……!”
“그거 말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빨리 설명 드리지 못해?! 이러다 진짜로 죽겠어!”
“아무, 아므, 힉, 것도, 히끅, 안, 했는데요……!”

난장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클레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쓰러진 본인의 탓이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죠.

때마침 시니아가 클레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 마님! 제발 도와주세요!”
“클레어?! 클레어!”

아슈팔트는 칼을 놓고는 장정들을 뿌리치고 클레어에게 달려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미안해요. 다들 진정하고. 정말로 미안해요.”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슈팔트의 눈을 보다가 예지에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예지는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잠시 후, 바지 밑으로 축축한 물웅덩이가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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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2

카테고리 없음 2023. 12. 18. 14:17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그거야 황제가 직접 참석할 정도 였으니 말이죠. 거기다가 5년만에 황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비췄으니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황비께서 행차하실 정도인겁니까?”
“모르셨어요? 클레어 공녀님이 황비궁의 문을 여셨잖아요?”
“아니, 황제께서도 열지 못한 문을 어떻게?”
“그게, 이건 제가 소문으로 들은건데.....”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는 호기심과 시기, 그리고 질투가 엉겨 붙어있었습니다. 단 한명의 영애가 도대체 어디까지 이 제국을 바꿔놓은 건가요. 푸른 곰의 마음을 녹이고, 황비궁을 개방하고, 남부의 무역상단을 손수 일궜으며, 난민과 빈민들의 식량을 개선해 놓은 그녀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결혼식장에 있는 이 호화찬란한 음식들도 보세요. 누구나 잡초라며, 나무 뿌리라며 빈민들조차 질색하던 이 ‘나물’이란 음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지식이란 말인가요. 거기에 ‘고추장’과 쌀을 섞은 ‘비빔밥’은 그야말로 미의 결정체였습니다. 귀족이나 되는 분들이 소중한 금덩이라도 되는 양 나무그릇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만들어낸 주인공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보통의 귀족 아내들은 황제와 황비에게 안부를 전하기만 해도 체력이 떨어져나가건만, 클레어는 달랐습니다. 품위를 잃지 않은 채, 한 사람씩 자신이 손수 걸어가 두 손을 잡아주고, 직접 절을 하며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와줘서 고맙네, 브렌다. 쌀이 정말로 품질이 좋아.”
“먼 길 와주었네, 이벨. 나물이 정말 맛있게 됐더군.”
“아, 이르펜. 어서오렴. 부모님께서는 잘 지내시고?”

식장을 개방해 평민부터 빈민들까지 초대한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더욱 대단한 것은 그곳에 온 평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직접 걸어다니면서 평등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이례적인가요. 그리고 이 얼마나 대단한 귀족적인 자세인가요.

네, 누구나 말합니다. 귀족 된 자, 아래를 무시하지 말라고.

그러나 누가 실천합니까? 누가 평민들의 이름을 외우고, 직접 치하하겠습니까.

지금 앞에 있는 두 부부가 그렇습니다. 귀족들은 코웃음 치면서도 내심 부끄러워 했습니다. 저것이 진정한 귀족의 모습이라고. 그들 중 일부는 아마 며칠동안이라도 평민들을 향한 관심을 가지겠죠. 그것만으로도 제국의 엄청난 성장을 불러일으킬 거란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한편, 클레어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뒤에서 시니아와 아슈팔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장에 도망쳤을지도 모르죠.

“마님, 보리를 재배해주신 레덴 부부에요.”
“정면에 단안경 쓰신 분이 이스타나 남작입니다.”
“왼쪽에 빈민 고아들, 납치되셨던 골목길에서 도와준 아이들이에요.”
“로데인 자작입니다. 우리 상회의 회계에요.”

명함을 전파하는 건 어떨까, 하고 클레어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암만 자신이 해보겠다고 한 일이지만, 그래도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모두에게 인사를 하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습니다.

드레스룸에 들어온 클레어는 갑갑하던 코르셋부터 벗어버렸습니다. 푸우, 하는 깊은 숨과 함께 해방감이 단숨에 몰려왔습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할 일이 많았습니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때마침 시니아가 따뜻한 홍차와 스콘을 가져왔습니다. 한 입 마시니 달콤한 벌꿀과 레몬향이 피로를 덜어줬습니다. 스콘에 크림과 딸기잼을 바르며 클레어는 손짓을 했습니다. 

“시니아, 너도 먹어 둬. 이 뒤에 또 일해야지.”
“아가씨, 아니 마님. 피곤하시면 그냥 다음에 가셔도.....”
“지금이 제일 큰 기회야.”

클레어는 스콘을 크게 깨물었습니다. 크림과 잼이 엉켜서 입술에 가득 묻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이 한 입을 더 먹었습니다.

“지금을 놓치면 화제성이 줄어들어. 지금이어야 돼.”

시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홍차를 더 따라주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콘을 반으로 쪼개 클레어의 앞에 놓아주고 나머지 반을 오물거리며 먹었습니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아슈팔트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인, 식사를 안했을 것 같아서 가져왔....”

방 안에 들어온 아슈팔트는 말을 잃었습니다. 속옷차림으로 볼이 미어터지도록 스콘을 먹는 클레어와 허겁지겁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니아의 모습은 참으로 귀족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것이 콩깍지는 단단히도 씌였나봅니다.

“재성합니다, 전하.”

입에 넣어둔 스콘을 꾸역꾸역 삼키며 시니아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아슈팔트는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게 하며 쟁반을 테이블 옆에 두었습니다.

“먹어둬라. 사이다도 가져왔으니 같이 먹고.”
“네......”
“클레어도 제발 천천히 먹어요. 자, 스프도 좀 들고.”
“미안해요, 애시. 일주일 째 물만 먹었더니.”
“괜찮습니다. 식기 전에 먹읍시다. 일하러 가야죠.”

그렇게 가족이 된 그들의 단촐하지만 우악스러운 식사가 계속됐습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빵을 찢고 수프를 마시는 소리 사이로 타닥, 타닥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다 마친 아슈팔트는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고는 클레어를 바라봤습니다. 배가 부른 지 행복한 한숨을 내쉬던 클레어는 느긋한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헤어 드라이어는 잘 될 것 같습니까?”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시니아.”

그 말을 들은 시니아는 어쩐지 뿌듯한 표정으로 헤어 드라이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치장도구란 생각이 들어 그것을 처음보는 아슈팔트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나무로 짜여진 그것은 길쭉한 주둥이와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푸른 마정석 하나가 손잡이에 박혀있었는데, 손에 잡아보니 엄지손가락의 위치에 딱 맞게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우물쭈물하며 둘러보던 아슈팔트는 그것을 시니아에게 건넸습니다. 익숙하게 그것을 잡은 시니아는 마력을 흘려넣었습니다. 휘우웅, 하는 바람소리가 주둥이 쪽에서 나더니 이내 따뜻한 바람이 아슈팔트를 향해 불어왔습니다.

오, 하는 짧은 감탄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레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바람을 이용해 머리를 말리는 거에요. 마력을 흘리는 양에 따라 바람의 세기나 온도도 바꿀 수 있으면 더 좋겠는데, 그건 오늘 한번 얘기하려구요.”
“어디, 잠시....”

다시 헤어 드라이어를 받은 그는 마력을 흘려보았습니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얼굴에 뿜어져 나와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을 보며 시니아와 클레어는 마주보곤 웃었습니다. 시니아가 처음 사용할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으니까요.

“신기하군요.”
“덕분에 제가 좀 편해졌어요.”

하며 시니아는 어깨를 두들겼습니다. 이전까진 수건을 이용해 부지런히 말려도 두시간은 걸리던 것이 이젠 30분이면 충분하니 말이죠.

“러우스 상회는 역시 믿을만 하네요. 나중에 연구자문으로 몇 명 고용하고 싶을 정도에요.”
“나중에 고려해보도록 합시다. 이번에는 투자자로 만족하고. 자, 옷부터 갈아입읍시다. 춥겠어요.”

웃으며 아슈팔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여전히 속옷차림이었던 클레어는 얼굴이 빨개지며 그제서야 몸을 가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슈팔트는 눈물을 흘리도록 웃었습니다. 

러우스 상회는 마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했습니다. 배도 부르고, 마차 안은 솜으로 채워놓아 따뜻하다보니 세 사람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아슈팔트가 자신의 코골이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마차 안이 습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창문을 살짝 여니 서늘한 바람이 마차 안을 환기시켰습니다. 뺨을 스치는 공기가 좋아 잠시 그러고 있었더니 시니아가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더 자도 된다. 곧 도착하면 깨우도록 하지.”
“아닙니다, 전하. 제가 잠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니아는 허리를 빳빳이 세웠습니다. 계속해서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고맙다.”

한창 잠들 뻔한 시니아는 눈을 깜빡였습니다. 아슈팔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잘못들었나 싶을 때 쯤.

“그 사람의 가족이 먼저 되어줘서.”
“전하…….”
“내가 대신해줄 수 없던 형제가 되어줘서.”

그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눈시울이 빨간 것이 피곤하기 때문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시에 잃고 만 가족들을 떠올린 탓이겠지요.

“네 덕이다, 시니아.”
“전하, 저는……그, 그래요. 먹고 살 길이 필요해서…….”
“거창한 건 아니야. 그냥, 고마워서.”

아슈팔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킬 수 없었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그 고통을 알고 있는 세 사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 그들만의 유대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시니아 역시 가슴이 뜨거워져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곳엔 소매로 눈가를 덮은 클레어가 있었습니다. 소매가 어쩐지 물기에 젖어있었지만 시니아는 그것을 모른척 하기로 했습니다.

마차는 어느덧 상회에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니 따뜻한 곳에 있었던 탓인지 입에선 하얀 김이 숨쉴 때 마다 올라왔습니다. 커다란 문 앞에 서있던 드워프 경비가 세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프레드리 공작님. 그리고 프레드리 공작비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발 밑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경비는 경비소 안쪽에 보고하고는 세 사람을 앞장서서 공방으로 향했습니다. 공방으로 향하는 길은 경비가 말한 만큼 미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쾌적할 정도였죠.

시니아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습니다. 이런저런 물건들이 커다란 마차에 실리고, 마차에서 내려지는 모습들이 어찌나 신기하던지요. 옆에서 클레어가 조용히 야단쳤습니다. 그것을 앞에서 들었는 지 경비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한번 견학하셔도 됩니다.”
“아니, 아닐세. 미안하군.”
“아뇨. 저희로서도 프레드리 공작님과 연이 생기면 좋죠.  부디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경비는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클레어는 빙긋 마주 웃었습니다.

“남부로 진출할 생각이군.”

경비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띄고 있는 미소가 조금 굳은 건 기분탓이겠지요.

“맞습니다. 내년 겨울 쯤엔 남부에도 분점을 세우려고 하고 있죠.”
“그래서였군.”

클레어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습니다.

“드로민 공방 부장이 직접 안내해줄 줄은 몰랐어.”

그 말에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오직 한 사람, 클레어를 제외하곤 말이죠.

드로민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뭐.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거래 상대로는 합격인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어안이 벙벙한 아슈팔트와 시니아를 대신해 클레어는 노래하듯 설명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온 물건을 생각해봐.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만들어 달라 하고, 그걸 팔겠다고 하는 사람. 수상쩍기 짝이 없지. 근데 소문으로는 남부에 상회도 만든 아가씨래. 상회를 만들려면 제일 필요한 건 정보력과 그걸 적용시키는 능력이야.”

클레어는 여전히 웃고있는 드로민을 향해 피식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시험해본거야. 과연 진짜로 내가 내 힘만으로 이룬건지. 진짜 본인의 실력이면 러우스 상회의 공방 부장 정도는 바로 알아볼테니까.”

시니아와 아슈팔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로민을 바라봤습니다. 감히 귀족을 시험하려 한건가 싶기도 하지만, 딱히 예의에 어긋나지도 않았습니다. 긴가민가한 그 선타기야말로 그가 한 상회의 부장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더욱 감탄스러운 건 고작 말 몇마디로 그 진의를 파악한 클레어겠죠. 아슈팔트와 시니아는 마주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아닌데요.”

드로민이 말했습니다.

“그, 시험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네, 뭐……그냥 결혼 축하드릴 겸 길 안내드리러 나온겁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영업 관련해서는 영업부랑 말씀을 나눠주시겠습니까? 저는 연구쪽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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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 1

카테고리 없음 2023. 12. 15. 15:47

클레어 로데니아의 삶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자다가 일어난 17살의 클레어는 대뜸, 자신의 전생이 김윤주이며 지금 자신이 판타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김윤주 씨는 이 세계에 환생한 대한민국에 거주했던 26살의 직장인입니다. 직업은 중소기업 경리구요.

비록 자신이 심심할때면 읽던 낭만 넘치는 세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이 세상이 소위 말하는 이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오늘, 클레어는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들여보았습니다. 유리로 된 거울 속에는 푸른 빛깔의 긴 머리를 가진 소녀가 있었습니다. 순하지도, 그렇다고 표독하지도 않은 눈꼬리. 어디서나 보일법하지만 물빛을 한 머리카락이 그녀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로데니아 공작가문의 외동딸이라는 지위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역시 클레어의 위상을 높인 건 바로 저 북부의 대공, 트로젠 왕국의 방패, 드래곤 슬레이어, 설원의 푸른 곰, 아슈팔트 프레드리와의 약혼이겠지요.

물론 아슈팔트에 대해 길게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조각같은 외모와 듬직한 어깨, 왕국 최고의 검술실력,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과 그의 충직한 신하. 알 건 다 아실테죠? 

아슈팔트와 클레어의 첫만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특히 왕의 앞에서 올려붙인 귓방맹이는 지금까지도 화자되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니까요. 

비록 그게 오해에서 시작된 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가의 장녀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올린 싸대기는 훗날 아슈팔트 대공이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보다 뜨거웠고, 프로스트 베어의 발톱보다 날카로웠다’ 고 저서를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 뒤에 남긴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처음이다’ 는 수많은 연애소설에서 사용된 문구이기도 합니다.

그런 클레어와의 약혼소식이 무도회장마다 울려퍼진 귀싸대기 소리의 유행을 부른 것도 뭐, 사실입니다만.

클레어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오늘은 그 아슈팔트 대공과의 결혼식입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올려 묶고, 화장을 한껏 한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고왔습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번쩍이는 보석들이 눈부실 정도로요.

“아가씨, 왜 한숨을 쉬고 그러세요.”

클레어를 치장해주던 시녀, 시니아가 클레어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습니다. 물론 원래는 무례한 행동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녀의 온기가 필요했습니다. 클레어는 자신을 감싸안은 손을 덮었습니다.

“그냥, 실감이 잘 안나서.”
“저도 실감이 안나요. 그 개구쟁이 아가씨가 약혼이라니. 거기다가 상대도 상대잖아요?”
“네 덕분일까? 네가 거기서 케이크를 엎지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테니까.”
“아, 아가씨! 그건 얘기하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시니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일부러 연기하는 게 느껴지는 말투였습니다. 물론 클레어도, 그리고 시니아도 그걸 잘 알고 있죠. 그래도 둘이 같이 지낸 지 벌써 5년이 넘어가니까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까르륵 거리던 시니아는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습니다.

“10살이나 차이나는 남편인데.....조금 아가씨가 아까워요.”
“시니아, 내 원래 나이를 생각해야지. 어린 애들은 애같아서 싫어.”

네, 시니아는 클레어의 전생에 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상대죠. 그녀의 기억덕에 이런저런 이득도 제일 많이 보고 있구요. 예를 들어 보습제라던가, 화장품이라던가.

“아가씨.....”
“자, 그만 투덜거리고. 오늘 할 일이 많잖니?”

그렇게 말하며 클레어는 화장대 옆에 놓인 기괴한 물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참조해 만든 물건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헤어 드라이어’라는 겁니다. 헤어 드라이어가 공용화되면 다른 여성들의 치장시간이 반은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녀는 오늘, 이것을 상회에 팔 생각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돈 걱정은 안해도 될거야!”
“확실히 이 헤어 드라이어라는 거, 너무 편하니까요!”
“흐흐흐. 드디어 돈방석에 앉아 유유자적한 삶을 살 수 있어....!”
“아가씨, 아가씨. 저 잊지 않는다고 한 약속, 기억하시죠?”
“그럼! 너는 내 연구자문으로 평생 놀고 먹게 해줄게!”

기운차게 대답하는 클레어의 뒤로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니아가 문을 살짝 열어 방문객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가씨, 리리아 트로젠 제 3 황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붉은 머리를 한 인형과도 같은 소녀였습니다. 나이는 17이나 먹었을까요. 어딘가 앳된 모습이 남아있었습니다. 머리 위에는 작은 티아라를 올린 그녀는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클레어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트로젠 왕국의 제 3 황녀님을 뵙습니다.”

클레어가 인사를 하던말던 리리아는 으르렁거리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흥!”

하고는 고개를 팩 돌렸습니다.

“어디서 감히 내 사람을 채가는 주제에...”
“황녀전하.....”

그리고는 성큼성큼 클레어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주었습니다.

“날도 추운데 어깨는 다 드러내고! 난로는 코딱지만큼 피워놓고! 옷은 이렇게 얇고! 머리엔 무겁게 보석이 잔뜩! 코르셋은 대체 얼마나 조여둔거야! 우리 언니 숨은 쉬어지는거야?!”

그리고는 와락, 클레어의 품에 안겼습니다. 클레어는 천천히 리리아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전하, 머리 망가져요.”
“그런 거 몰라.”

난처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클레어는 시니아를 향해 손짓을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이해했는지, 시니아는 문을 조용히 닫고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을 들었는지, 리리아는 더욱 품을 파고 들었습니다. 코르셋으로 한껏 조여진 배가 눌리는 압박감이 힘들지만, 클레어는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나 부비적 거리던 리리아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꼭 행복해야돼, 언니?”
“물론이죠. 이렇게 사랑하는 전하도 계신걸요.”
“…...내가 받은 건 돌려주지도 못했는데.”
“전하께서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시는 모습만 봐도 제가 받은 게 더 많은걸요?”

리리아는 헤죽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입술이 삐죽 내밀며,

“이런 착한 사람이 그런 곰 같은 녀석한테 시집가는 게 이해가 안가.”
“곰 같은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그 말에 둘은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훤칠한 남성이 문가에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부진 어깨와 터터질듯한 가슴팍의 셔츠가 단련된 그 아래의 근육을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달린 훈장들이 아무리 빛을 발해도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의 미혹에는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슈팔트 프레드리, 푸른 곰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로 클레어의 남편이 될 사람이죠.

“그래도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그 품은 저만의 것이라서 말입니다.”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습니다. 그에 물러나듯이 리리아는 더욱 깊이 클레어의 품에 껴안겼습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리리아는 아슈팔트를 노려봤습니다.

“결혼식날 신랑이 신부를 보러 오는 건 안좋다고 들었는데, 아슈팔트 프레드리 공작?”
“결혼식을 질투하는 악령이라면 걱정마십시오. 방금 물리치고 온 참입니다. 시니아란 악령인데, 문 앞에서 들어오면 안된다고 하소연 하길래 애 좀 먹었죠. 마침 여기도 한 분 계시군요.”

능글맞게 웃으며 아슈팔트는 리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3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까는 악령이라더니요?”

피식 웃으며 대신 답한 클레어가 리리아를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아슈팔트는 무릎을 꿇은 채 클레어에게 웃음을 짓고는 리리아를 바라봤습니다. 리리아는 건방진 표정을 지었습니다.

“황족을 악령이라 멸칭한 죄, 이는 중대한 죄이다. 나는 이것을 좌시하지......”
“대기실에 커스터드 슈크림을 준비했습니다만.”

리리아는 잠시 눈을 데록 굴리고는 침을 꼴딱 삼켰습니다. 그러나 이내 더욱 목에 힘을 줬습니다.

“황족에게 감히 뇌물을...”
“사이다도 준비했습니다.”
“그럼 묵비하도록 하지.”

키득키득 웃으며 리리아는 클레어의 품에서 벗어나 아슈팔트의 앞에 섰습니다. 아슈팔트의 키가 워낙에 큰 나머지 무릎을 꿇은 채로도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습니다.

리리아는 아까까지 짓던 웃음기를 지웠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황족의 품격을 갖춘 리리아를 본 아슈팔트 역시 웃음을 지우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습니다.

“아슈팔트 프레드리 공작. 리리아 트로젠 제 3 황녀의 명을 받으라.”
“아슈팔트 프레드리,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슈팔트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리리아에게 내밀었습니다. 자신의 손은 지금부터 명령권자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리리아는 내밀어진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습니다. 

“우리 언니, 잘 부탁해요.”
“황명을 받겠습니다.”
“언제나 웃게 해줘요.”
“황명을 받겠습니다.”
“내 몫까지 사랑해주고.”
“황명을 받겠습니다.”

리리아는 손을 거뒀습니다. 아슈팔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우리 언니 눈에서 눈물나면 가만 안둬요!”
“황명을 기쁘게 받겠습니다.”

히죽 웃으며 방을 나간 리리아를 시니아가 안내했습니다. 그걸 본 아슈팔트는 클레어에게 걸어와 가볍게 입을 맞췄습니다.

“미안합니다. 혹시 둘을 방해했습니까?”
“조금요?”

키득키득 웃는 그녀를 보며 과장된 당혹감을 보이던 아슈팔트는 화장대 위로 시선을 보였습니다.

“꼭 오늘 가야겠습니까? 피곤할텐데 다음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의 시선을 따라 헤어 드라이어를 본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괜찮아요. 오늘 이목이 가장 집중될텐데, 선전하기 좋은 날이죠.”
“무리하지 않는 게....”
“애시.”

다정하게 남편의 애칭을 부른 클레어는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날 믿어요.”
“....힘들면 바로 돌아오는겁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오고 문 밖에서 집사가 소리쳤습니다.

“대공전하, 그리고 아가씨. 입장을 준비 해주십시오.”

아슈팔트는 클레어를 보며 미소지었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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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와 검은 잉크자국, 그리고 부러진 깃펜이 어지럽게 놓인 책상. 누가 보면 쓰레기장인 줄 알 이곳이 내 책상이었다.
꾸준히 정리는 하고 있지만,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또 이 모양으로 돌아왔다. 옆을 보면 에이다 대리의 자리도 만만치 않으니 딱히 내가 더러운 건 아니겠지?
자리에 앉아 대충 정리를 한 뒤, 방금 전 불을 켠 스크롤을 펼쳤다. 수정을 뽑아뒀으니 불이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스크롤엔 이런저런 기호와 마법진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있었다. 이 기호들과 마법진들이 연동해 불이 켜지는 구조다.
그럼 이제 불을 끄는 마법진을 만들어야한다. 
우선 옆에 있는 책을 펼쳤다. ‘초보자도 4주만 따라하면 스크롤 매지션’이라. 오늘로 4주차니까 어디 한번 보자고?
책장을 쭉 넘겨 ‘제 19강. 진짜 실습! 스크롤 위로 불을 켜보자!’로 넘어왔다. 불을 켜는 예제가 있으니 불을 끄는 예제도 있을텐데…….
갖가지 기호와 도형, 마법진들을 지나서 드디어 내가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

[……이 장을 보고있단 것은 여러분의 감격스러운 첫번째 마법 스크롤이 완성된 이후일 것이다. 그럼 그 스크롤을 보며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거, 어떻게 끄지?’

바로 그렇다! 이것이 바로 스크롤 매지션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다! 언제나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불을 붙이는 스크롤을 만들었으면 당연히 불을 끄는 스크롤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다음장에서는 붙였던 불을 끄는 스크롤의 작성법과 마법진의 원리에 대해 배워보자.]

그 다음장에는 다양한 기호들과 마법진들이 나열되어 있다. 열심히 메모장에 따라쓰고 있자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하, 뒷장은 아직이었어?”

에이다 대리가 긴 담뱃대를 입으로 질겅거리며 물었다. 나는 책을 슬쩍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런 마법진이나 도형같은 거, 다 외우고 다니시는 거에요?

내 말에 에이다가 담배연기를 후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가 쓰고있던 메모장을 뺏어가더니 그걸 한장씩 넘기며 봤다.

“착각하는 것 중 하난데, 마법진은 외우는 게 아니라 익히는 거야. 이런 그림 쪼가리 외울 시간에 한번이라도 예제 따라해 가면서 익히는 게 이득이라니까.”
“그치만 안외우면 그리지도 못하잖아요.”
“책 보고 배껴. 뭐 하러 머리아프게 외우냐.”

한국식 주입식 암기교육의 폐해인지, 외우지 않고 이걸 익힌다는 상상이 도무지 가지 않았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그녀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옆에 의자에 앉아 깃펜을 잡았다. 양피지 위에 거침없이 도형을 그리는 모습이 어쩐지 어울렸다.

“자. 불을 켤줄도 알고 끌줄도 알아. 그럼 뭘 해야겠어?”
“…….”
“켰다 꺼야지. 여기에 지연 술식을 추가하기만 해도 되잖아.”

사각 사각.
깃펜은 양피지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에이다는 책을 마구잡이로 뒤적이며 마법진들을 손으로 짚었다.

“이거, 불을 켜는 마법진이지. 여기에 지연 술식을 추가하고. 마력안정화 추가하고. 그리고, 여기 있네. 불을 끄는 마법진. 이거 추가하고, 이걸 청색 수정에 연동하고. 그리고 여기에…….”

이것저것 가리키고 따라그리고 하더니 순식간에 스크롤 하나가 만들어졌다. 아까전에 내가 만든 스크롤에 비하면…….
에이다는 나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신기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걸 해봤기 때문에, 발이라도 걸쳐봤기에 보이는 경지.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희성 씨. 이거 희성 씨가 다 해본 것들이야. 똑같이 따라할 수 있어.”

그녀가 스크롤을 내게 내밀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전부 내가 해본 것들이다. 그것을 엮는 방법도, 마법진들도 전부. 
나는 수정을 통해 마력을 흘려넣었다. 화륵, 하고 푸른 불꽃이 스크롤 위로 피어올랐다. 다시 수정에 마력을 흘리니 불꽃이 꺼진다.
그저 그것뿐. 그저 켰다 껐을 뿐이다. 그럼에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희성 씨는 확실히 암기력이 좋아. 그러면 이 형태를 기억하는거야. 이 안에 쓰여진 건 전부 그것에 대한 받침일 뿐. 의미없이 이파리의 개수를 외우지 말고, 숲의 형태를 보는거야.”
“……잘 모르겠어요.”
“그치? 그러니까 일단은.”

에이다는 책을 내 앞으로 밀었다. ‘초보자도 4주만 따라하면 스크롤 매지션’의 소개문이 펼쳐져 있었다. 

“따라해봐. 그러면서 익혀나가는거지. 어렵지 않잖아?”

소개문의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따라하고, 익히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에이다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 위의 양피지에는 에이다가 그려넣은 마법진이 놓여있다. 천재적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다.

기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 그리고 그 기본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따라하라는 말. 
나는 양피지를 새로 꺼내 깃펜에 잉크를 채웠다. 그리고 에이다의 마법진을 똑같이 따라 그려갔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수정을 건드리니 불이 켜진다. 다시 건드리니 불은 훅 사라졌다. 아까 전 봤던 마법과 완전히 똑같은 마법 스크롤을 제작한 것이다.
나는 책을 펼쳐 이 기호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가장 기초적인 기호들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 기초들이 모여 복잡한 진을 형성하고, 그것들이 짜여져 하나의 스크롤을 구상했다.
이것이 ‘불을 켜고 끄는 마법.’
이것이 가장 단순한, 나의 기본이 될 마법.
그것을 깨닫는 순간, 책의 표지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히익?!”

깜짝 놀라서 책을 던져버렸다. 그러나 책은 얼마 날아가지도 않고 공중에 둥실둥실 떠있었다.

“대, 대리님! 저거, 저거 뭐에요?!”

나는 에이다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단한데. 4주동안 잘 따라왔어, 희성 씨.”
“아니 그러니까 저게 뭔데요?!”
“저 책의 표지에 뭐라고 써 있었지?”

책 표지? 책 이름? 그러니까……? 초보자가 그 뭐 그거?

“초보자도 4주만 따라하면 스크롤 매지션.”

에이다가 히죽히죽 웃으며 책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 표지의 빛은 이제 책 전체를 뒤덮으며 사무실을 메웠다. 눈을 뜰 수도 없는 빛에 나는 눈을 가릴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점점 사그라졌다. 나는 침침하기까지 한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뜰 수록 사무실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양피지가 널부러진 책상, 잉크얼룩이 가득한 깃펜,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책.
책이 날아다니고 있다. 책이 날아다니고 있는거야 마법도 있는 마당에 뭐 신기할 것도 없지.
다만 그 책의 표지에 얼굴이 달려있다면 조금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

“으어어억 씨X!”

금색 눈썹과 잘 정돈된 콧수염. 강인한 눈매와 두껍고도 오똑한 콧날. 앙 다문 입술이 굳건한 얼굴이 달린 책이 황금색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모습이, 정말이지, 아, 맙소사.

“존X 징그러!”

왜 아저씨 얼굴이 달려있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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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요?”
“그래, 생선가시 말이야.”

점심을 살짝 지나가는 시간. 식사도 했겠다, 꾸벅꾸벅 졸던 나는 옆에서 들려온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잠에서 깨어버렸다. 옆을 바라보니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 여성이 의자에 앉은 채 앞에 서있는 난장이를 보고 있었다. 쫑긋거리는 길다란 엘프 특유의 귀가 그녀의 감정을 여실없이 드러내고 있다.

“갑자기 무슨 생선얘기에요?”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러자 풍채 좋은 중년의 남성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 박희성 사원. 마침 잘됐어. 그래, 생선가시가 문제야.”
“그쵸. 고등어는 가시가 좀 많죠. 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 보네요.”

하품을 쩌억 하며 오늘 점심으로 나온 고등어 자반을 생각해봤다. 음, 고등어 맛있지. 여기나 저기나 가시 떼기가 귀찮은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드로민 부장이 한껏 자란 턱수염을 쓸으며 웃음을 터뜨리신다. 한편 내가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버릇없이 보였는지 귀를 날카롭게 세우며 에이다 대리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슬며시 눈을 피하는 척 노트와 펜을 준비했다.
드로민 부장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뒤에 있던 의자에 털퍽, 앉았다. 끼긱 하며 의자가 꺾이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다.

“그래, 아무튼 생선가시란 말이지. 이번에 사실 ‘생선가시 제거 마법’쪽으로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응? 그런 것도 만들었나요?”

내가 눈을 껌뻑거리며 에이다 대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드로민 부장 역시 히죽 웃으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끼긱, 끼긱. 조만간 의자를 바꿀 때가 올 것 같다.

“희성 씨, 아키나 공국과 나르카 왕국이 전쟁중인 건 알고 있겠지?” 
“아, 네. 교육 때 듣긴 했죠.”
“좋군. 얘기가 빠르겠어. 전쟁이 지속되면서 사실 자재 수급이 제대로 되질 않는 모양이더군.”
“생선 쪽이 말인가요?”
“아니, ‘흰색 대리석’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부장과 대리 사이엔 조금 더 긴 침묵이 오갔다. 서로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에이다 대리가 앗, 하며 내게 물었다.

“혹시 ‘흰색 대리석’이 뭔지 모를……수 있겠다.”
“가끔 보면 두분이 절 놀리는 것 같을 때도 있어요.”
“놀리는 때도 있긴 한데. 아무튼.”

내가 눈빛으로 항의를 하거나 말거나, 에이다 대리는 설명을 이어갔다.

“기본적으로 ‘생선가시를 제거하는 마법’과 같이 물체 안의 다른 물체를 제거하는 마법은 물의 마나를 사용해. 근데 이 물의 마나를 쓰는 주요 매개체가 대리석이고, 그중에서도 ‘흰색 대리석’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거든. 문제는 이 흰색 대리석의 공급이 막혀버린거지. ‘흰색 대리석’의 최대 매립지인 아키나 공국이 전쟁중이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사실상 ‘생선가시를 제거하는 마법’의 공급이 막혀버린거야. 이야, 난 살다살다 고등어에 그렇게 가시가 많을 줄 몰랐는데.”

호오, 그렇군, 그렇군.
정말 하나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대리석이 어쩌고, 뭐 어쨌단거야.

“그래서, 그 대리석이 안나와서 생선가시를 못뽑아낸다구요?”
“바로 그렇지!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이 ‘생선가시를 제거하는 마법’을 개발하기로 했단거지!”

그렇게 말하며 드로민 부장이 허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삐걱거리는 의자소리가 사무실을 한가득 채웠다. 

“대리석 없이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꾹 깨무는 에이다 대리의 표정이 어쩐지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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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말하는 소설 장르 중에 이세계물이라는 게 있다. 마법인지 스킬인지 모를 뭔가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휘둘러지는 이세계에 평범한 주인공이 희대의 사기적인 방법으로 영웅이 된다는 내용이다.
나 역시 그런 소설들을 좋아하던 평범한 직장인 중 하나였으며, 일하는 짬짬히 읽으며 그런 세상을 꿈꾸고는 했다.

어느날 클리셰처럼 트럭에 치였을 때, 그리고 대뜸 사무실 천장에서 뚝 떨어졌을 때만 해도 난 내가 꿈꾸는 세상에 들어온 줄 알고 내심 설레하고 있었다. 엘프도 있었고, 드워프도 있었고, 수인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에 낭만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세계 난민 교육 센터’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명을 듣다보면 이세계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모험이랄 것도 없고, 사교계는 내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으며, 마법은 주문만 외우면 불이 튀어나오는 그런 것과는 너무 달랐다.
즉, 내가 생각하던 이세계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내가 떨어진 곳에는 난민 지원이 꽤나 체계적으로 짜여져있어 이런저런 보조금이나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만약에 한창 전쟁중인 국가로 떨어졌다면 최전방으로 끌려갔을테니까.
약 3개월의 속성교육을 받은 후, 나는 ‘러우스 상회’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번에 상회에서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 마법 스크롤 개발 부서를 만들었는데, 마침 그곳에 내가 지원서를 낸 것이다.
아마 날 채용하면서 받을 지원금이 목적이었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했다. 비록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실습도 하고 공부도 해가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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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힘들다.”

회사 뒷문의 우거진 나무 밑. 
긴 담뱃대를 꺼내며 에이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색의 나뭇잎을 욱여넣으며 궁시렁 거리더니 내게 나무로 된 담배갑을 내밀었다.

“하나 끝내면 또 하나 가져오고. 그것도 뭘 자꾸 이상한 것만 물어 와. 그치?”

담배갑에서 연초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을 때 상사가 동의를 표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만으로 대답이 되는 법이다.

“빨리 희성 씨가 1인분은 해 줘야 내가 편할텐데. 공부는 좀 어때?”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잘 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네요.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어요.”
“일단 꾸준히 해 둬. 내가 다~밟아 온 길이니라.”

에이다는 키득키득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아까 챙겨온 손바닥만한 양피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말았다. 손가락 마디만한 양피지의 겉부분에는 손톱만한 푸른색 수정이 박혀 있었다.
에이다는 그걸 받아 수정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렸다. 

“뭐 막히고 그런 건 없지? 아직 기초적인 거라서. 한번 볼까?”

그녀의 손톱이 닿을 때 마다 창백한 불빛이 수정 안쪽에서 퍼져나갔다. 몇 번 두드리자 이윽고 수정에서 뻗어나가던 푸른 불빛이 양피지의 안쪽에서 무언가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말린 양피지의 위로 성냥불만한 불꽃이 화륵, 타올랐다. 수정과 마찬가지로 푸른색을 발하는 불꽃이었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만든 마법 스크롤, ‘작은 불을 켜는 마법’이다.

에이다는 내가 만든 스크롤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푸른 불꽃은 나뭇잎을 파스스, 태우더니 이윽고 흰색의 연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뱃대를 한번 깊게 빨아들인 그녀는 후우-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나뭇잎과 같은 자주색의 연기였다.
그녀는 스크롤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방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불이 붙어있는 스크롤을 내게로 내밀었다.

“응, 좋네. 마력도 안정적이고. 붙여줄까?”
“감사합니다.”

내가 스크롤에 담배를 가까이 하자마자 화륵, 하고 담배끝이 빨갛게 타올랐다. 한번 깊게 빨아들이니 향긋한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마치 숲속을 걸을 때의 상쾌하고도 시원한 냄새였다. 

“어……? 우와……?”

내가 멍하니 있자 에이다가 키득키득 웃으며 담배갑을 꺼내들었다.

“신기하지? ‘마력에 반응해서 맛이 달라지는 마법’을 담은 담배. 이런 건 원래 세계에 없지?”
“깨물면 맛이 바뀌는 담배는 있죠.”
“그건 좀 신기한데. 나중에 건의해볼까.”

후우, 하고 자주색 연기를 내뿜은 에이다는 다시 스크롤의 수정을 톡톡 건드렸다.

“잉?”

톡톡, 톡톡, 톡톡톡톡톡톡. 
한참이나 수정을 두드리던 그녀는 스크롤을 내게 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성 씨. 이거 안꺼지는데?”
“……아. 까먹었다.”

화륵, 화륵. 스크롤 위로는 파란 불꽃이 남실남실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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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선과 악이 존재했다.

“각오해라, 마왕 루시페리온!”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마족에게 덤비느냐! 용사 강진호!”

언제나 악이란 존재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선이 존재했다. 

“크읏, 이세리! 감히 네놈이 우리를 배신하고 용사에게 붙었단 말이냐!”
“흥,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원래부터 인간의 편이었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네 밑으로 들어간 척 한거지!”

그러나 항상 선은 나약했으며, 악은 무자비한 그 힘을 휘두르기 마련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라! 스크롤 해방! [ 불꽃덩이 ]!”
“그까짓 나약한 마력이 깃든 스크롤 따위로 날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

선은 그렇기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선을 찾아왔고, 그 이어진 선들은 결국 악을 무찌르기 마련이었다.

“우읏?! 이, 이 힘은 뭐냐! 이런 나약한 마력 따위로 감히, 감히!!”
“잘 알아둬라, 루시페리온! 이것이 인간의 선한 의지임을!”
“이 마계의 지배자 루시페리온이!! 인간주제에!!”
“이야아아아앗!!”



……물론.

“허. 저거 생각보다 괜찮네요.”
“난 항상 이 순간이 너무 좋아. 내가 만든 게 잘 굴러가는 거 보면 참 마음 뿌듯하단 말이야? 이야, 잘탄다!”

누군가는 그 선에 정당한 대가를 매겼고.

“그래서. 저거 팔릴 거 같아요? [ 불꽃덩이 ]?”
“어…….”

대가는 정당한 금전이었으며.

“안 팔리지.”
“그쵸? 저건 너무 세네. 출력 조절을 좀 할까요? 오메, 용사 불붙었다!”
“뭐? 이런 씨, 오. 역시 용사는 다르네. 저걸 튕겨내? 어, 단계별로 나누는 건?”

정당한 금전은.

“그거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건데요.”
“아, 그랬지. 쟤들이 안한다고 했었지.”

정당하게 우리 뱃속으로 들어오기 마련이었으니.

“하여튼 우리 윗분들은 대가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그래서 이거 안된다고 했죠. 그리고 불꽃덩이가 뭐야, 불꽃덩이가.”

우리는 장사꾼.
선을 팔아 지갑을 채우는 개발자 나부랭이.
악을 묻어 저녁밥을 사먹는 위선자 나부랭이.

“아 그건 과장님한테 얘기하라고. 세린 과장님이 지었잖아.”
“그러니까 대리님한테 말씀드리는 건데요. 말씀 좀 해달라고.”

많이들 사가세요, 많이들 사가세요. 
우리는 마법개발부.

“너 요즘 개긴다?”
“개기긴 뭘요. 담배나 하나 좀 주세요. 오, 저기 끝나간다.”
“벌써? 화력 죽이네. 희성아, 가스레인지? 그거 저걸로 좀 개발은 안돼?”

많이들 팔아주세요, 많이들 팔아주세요. 
우리는 마법개발부.

“냄비 태우면 또 출장인데요. 안그래도 어제, 아, 온다.”
“아 뭔 벌써. 이야, 고생하셨습니다~! 용사님들 덕분에 또 다시 세계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에이다 대리님! 정말 대단한 스크롤이었습니다! 덕분에 루시페리온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과, 약간의 동전만 들고오세요. 뭐든지 만들어드립니다.

“아뇨 아뇨, 별 말씀을~!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야 이 한몸 아깝지 않죠!”
“하하하! 역시 러우스의 스크롤은 믿을 수 있군 그래!”
“왕실 마법사이신 데리안 공작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신다면야 너무 영광이죠~. 다음에도 또 이용해주시면 더 영광이구요~.”

그러니 부디.

“그런데 말이야.”
“네?”

클레임만은 말아주세요.

“이 [ 불꽃덩이 ]란 스크롤, 참 성능은 좋은데 말이지. 쓰기에는 너무 화력이 센 것 같군.”
“아, 확실히. 하마터면 저도 휘말릴 뻔 했으니까 말이죠. 그런 것에 대한 안전대책이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그런 건 미리 말해주세요.

“이거 수정 되죠?”

우리도 힘들어요.

“……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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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네이버 시리즈에서 활동하시는 월하야담 님의 '귀령'을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령' 2부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납골당에서 나온 건우는 흡연실을 찾아 들어갔다. 흡연실 안에는 환풍기가 작동하지 않는지 매캐한 담배연기들이 자욱하게 쌓여있었다. 빈속에 숨을 쉴 때 마다 담배연기가 쌓이니 또다시 구역질이 치솟았다.

"큭……!"

쓰라린 위액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불쾌했다. 간신히 참아낸 건우는 가래와 함께 쓴물을 뱉어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옆에서 불쑥, 하고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옆을 보니 중년의 여성이 건우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물병 하나가 손에 들려져 있었다.

"아, 아뇨……그……."
"괜찮으니까 드세요. 많이 힘드시죠?"

어서 받으라는 듯이 페트병을 흔드는 여성에게서 물병을 받았다. 방금 막 구매했는지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 위에 시리도록 느껴졌다. 잠시 물병을 바라보던 건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 어머님도……."
"저는 저희 어머니 49재셔서요."
"아, 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건우에게 손을 내저으며 여성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것에 화답하듯 건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감사합니다."

건우는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차가운 물을 마셨다. 빈 속이 찬물로 채워지는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여성은 페트병을 비워가는 건우를 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ㅡ치익, 치익. 스읍, 후.

짙은 담배연기 한줄기가 흡연실을 메웠다. 건우 역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뒤적거렸다.

"……잃으신 지 얼마 안됐나봐요."

담배를 찾던 건우는 멈추고 여성을 쳐다봤다. 여성은 안쓰러운 눈으로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잡았던 담배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부모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리고……."

건우는 처연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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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실 옆의 공원 벤치. 둘은 통성명을 했다.

여성의 이름은 이주연. 고등학생 아들을 둔 그녀는 혼자 어머니의 49재를 위해 찾아왔다가 너무 괴로워하고 있어 보이는 건우를 보고는 아들 생각이 나 그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그런데 남편분이나 자녀분들은……."
"저 혼자 왔어요. 애가 수능이 코앞이라서."

아직 4월이건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주연의 말에 건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할 시기니까요. 일분일초도 맘대로 쓸 수 없죠."
"……네."
"그럼 건우 씨는……."

조심스럽지만 그의 사연이 궁금하다는 시선. 남들이 보기에는 실례가 아닐까 하지만 어째선지 건우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털어놓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야.

"……그, 결혼……하려고 했었던 사람입니다……."
"아……."

첫마디를 떼는 것이 어려웠을까.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에 대한 건 말하지 못하다보니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주연은 별로 개의치 않다는 듯이 따로 물어보는 낌새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본인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머나'라던가, '세상에'라던가, '어쩜 어쩜'이라던가. 수많은 추임새를 넣어가며 이야기를 듣던 주연은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어느새 축축해진 손수건을 곱게 접어 핸드백에 넣은 주연은 건우의 두 손을 꽈악 잡았다.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밥도 안드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입맛도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앞에 가서 국밥이라도 꼭 드셔야돼요."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건우를 보던 주연은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애들 점심시간이라."
"아닙니다. 마음만으로도 제가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꼭 드셔야돼요!"

그렇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 주연은 공원길을 걸어나갔다. 건우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흡연실로 다시 들어왔다.

주머니에 구겨져있던 담배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를 찾았다.

"남편 분 하시는 사업 잘 되시고……. 아드님도 좋은 대학 가시고……. 손녀는 이른 시기에 보니까 너무 아드님한테 화내지는 마시고……."

오랜만에 대화를 해본 탓인지 조금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장님네 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사람과 대화를 한 것 만으로도 어쩐지 조금은 기운이 났다.

저 멀리엔 여전히 주연이 오솔길을 걸어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라이터를 찾은 건우는 담배에 불을ㅡ.

"……어?"

ㅡ붙일 수 없었다.

방금 뭐였지? 건우는 담배를 떨어뜨리고는 입을 가렸다. 그러나 한번 움직인 입술은 멈출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자신의 힘으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틀어막은 손의 틈새 사이로 무언가가ㅡ.

"무, 무, 무병장수 하니 조상님 덕이요……만사가 형통하니 쌓아온 덕이요……지금처럼만 지내면……대대손손……!"

그는 흡연실을 뛰쳐나와 공원의 오솔길을 따라 뛰어갔다. 저 멀리엔 여전히 주연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수다를 떠는 주연의 몸이 뒤로 돌며 건우를 쳐다봤다. 놀란 듯 커다래진 눈동자가 건우의 눈에 들어왔다.

"거, 건우 씨?!"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소리를 지르며 놀란 것은 오히려 도건우였다. 꼴사납게 주연의 앞에 넘어진 건우는 덜덜 떨면서 주연을 바라봤다.

아니, 주연이 아니다.

"아, 아, 아……!"

놀란 채 굳어버린 주연의 바로 뒤에, 두 노인이 손을 맞잡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어쩐지 주연과 닮았다.

아니, 주연이 저 둘을 닮은 것이다.

"저, 저기……괜찮아요?"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주연. 그리고 그에 맞춰 한 걸음씩 다가오는 두 노부부.

인자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인자함은 공포로 다가올 뿐이었다.

"오, 오지마!"

건우는 주연을 지나쳐 도망치듯이 납골당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눈에 띄는 하얀 트럭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끼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고 그는 납골당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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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네이버 시리즈에서 활동하시는 월하야담 님의 '귀령'을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령' 2부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 납골당.


자욱한 향과 기도하는 소리가 그 안을 가득 메운 곳에서 한 청년이 유골함 앞에 엎드려 있었다.
한참이나 절을 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 건우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왔습니다."


무뚝뚝함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건우는 안부인사를 올렸다.


이윽고 메고있던 배낭에서 북어포, 사과, 배, 청주 한 병을 꺼내 유골함 앞에 있는 작은 상 위에 차렸다.


조촐한 차례상이었지만 상이 작아서 그런지 한가득 차 보였다.


향을 꽂아 넣은 후,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향불이 피어올랐다. 아찔한 향내가 건우의 코를 찔러왔다.



"준비한 게 이것 뿐이라 죄송합니다. 다른 건……준비할 수가 없더라구요."


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턱을 쓰다듬었다. 자른 지 얼마나 됐는지, 거칠거칠한 감각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원래라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울컥하는 마음이 한 순간 피어올랐다가, 그것을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깊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니 허전한 마음만 가득해졌다.


"원래라면……신부감도 데려왔을겁니다."


그 순간, 치밀어 올라오는 구역질에 건우는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변기통에 주저앉아 안에 든 것을 쏟아내려 했지만, 나오는 것은 허여멀건한 위액 뿐이었다. 최근 며칠동안이나 먹은 것이라곤 물밖에 없었으니까.


얼마나 토악질을 해댔는지, 쓰라린 속을 감싸며 건우는 변기 앞에 주저앉았다. 더러운 화장실 바닥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의 인생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야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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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겠다고 그렇게나 다짐했다.


언제나 옆에 있는 범으로서 살겠다고 그렇게나 다짐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스러져 간 해원보살님 앞에서, 자신을 아들처럼 아껴주던 이장님 앞에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금화보살님 앞에서 그렇게나 다짐했다.



그랬는데.



결국 건우는 거대한 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범은 무슨, 영지의 놀림대로 그는 기껏해야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태상장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결국 하연은 건우에게 산군의 기운을 씌우고, 그는 온 몸에 쏟아지는 기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을 허옇게 뒤집어 깐 만덕이 기절해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온 몸의 근육이 모조리 끊어진 듯한 고통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는 차디찬 흙바닥에서 피거품을 내뿜으며 꿈틀거릴 뿐이었다.


'선녀님.'


그 격통 속에서 든 생각에 건우는 어기적 어기적 기어서 몸을 돌렸다. 자갈들이 상처를 긁을 때 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그는 세암당을 바라봤다.


그리고 배를 끌어안은 채 쓰러져있는 하연을 봤을 때.


"아……아아……!"



신경을 찢는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연을 향해 기어갔다. 손톱이 뜯겨나가고, 뺨이 갈려나갔다.
그렇게 간신히 세암당의 툇마루에 올라왔을 때.


"안돼……안돼, 안돼, 안돼, 안돼……!"


그는 하연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힘이 모조리 빠져버린 사람 특유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가볍던 하연의 몸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선녀님……선녀님, 눈 좀 떠보십시오……선녀님……!"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마치 길디 긴 잠을 자듯이, 하연이 추욱 늘어졌다. 건우는 먹물과 핏물이 뒤섞인 하연의 손을 기도하듯이 꽈악 붙잡았다. 그러나 따스했던 그 손은 마치 흙바닥처럼 거칠고, 차가웠다.



"선녀님……다 끝났습니다……다 끝났다구요……이제 일어나셔야죠……."


언제나 빨갛던 볼은 핏기가 빠져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는 하연의 가슴에 귀를 댔다. 또, 볼록하게 올라오기 시작한 그녀의 배에 귀를 댔다.
들려오는 것은 고요뿐이었다.


"선녀님……! 이화선녀님!"


그는 마구잡이로 하연의 몸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 감긴 눈은, 떠질 줄 몰랐다.


"하연아아아아아!!!!!!!!!"


그렇게, 이제서야 피어나기 시작한 꽃은.
그렇게, 져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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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뭘 해야 할까요……?"


간신히 구역질이 멈춘 건우는 다시금 부모님의 앞에 섰다. 미친 듯이 찾아간 금화당의 전안에서, 신장칼을 움켜쥔 채 목을 매단 만덕의 시신을 본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암당으로 갈 수도 없었다. 서울에 있던 그의 집은 팔아넘긴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편히 쉬지도 못한 채 그는 그저 숨만 붙어 살아있었다.


그래, 살아있었다.


오직 그만이 살아있었다.


가족도, 연인도, 아이도, 복수할 대상마저 잃어버린 채, 그는 살아있었다.


"왜 제가 살아있는건가요……?"


대답없는 물음에, 그저 향불만이 타오를 뿐이었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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