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모음 4

카테고리 없음 2023. 12. 21. 11:52

응접실에는 네명이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있었습니다. 아직도 적대적인 시선을 뿌리는 아슈팔트, 그런 그를 달래주고 있는 클레어와 시니아, 그리고 그 중심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예지.

예지는 펑퍼짐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가죽옷을 맨몸에 입어서인지 불편한 듯 몸을 자꾸 뒤척였습니다. 한참이나 그런 모습을 보던 아슈팔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세계의……지구? 란 곳인 거죠.”
“네. 저와 예지는 거기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리고……과외……? 가정교사……같은…….”
“고 1때……수학 선생님이셨어요.”
“고 1……? 처음 듣는 단어인데……. 그……당신은……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죠. 작년이니까 스물 일곱이에요.”
“그리고 그, 임 아가씨……?”
“이름으로 부르셔도…….”
“그래, 예지. 5년 전에, 교통? 사고로…….”
“네. 5년 전이랑 하나도 안바뀌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음……그럼 지금은 20살이겠네?”
“……네.”

가만히 설명을 듣던 아슈팔트는 테이블 위의 홍차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지는 그 모습에도 흠칫 놀란 듯 힉, 하는 숨소리를 내었습니다. 아슈팔트는 그런 애처로운 모습에 손을 거두었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예지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까는……미안하다. 내가 조금 정신이……어떻게 됐었나 보다.”
“네에……괜찮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예지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습니다. 아직도 겁에 질린 듯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슈팔트는 답답했는지 목의 단추를 몇 개 풀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조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어른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실망하셨나요……?”

클레어는 고개를 살며시 돌렸습니다. 그러나 아슈팔트는 그녀의 손을 꽈악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습니다.

“그럴 리 있습니까.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인걸.”
“애시…….”
“그래도 최소한 당신한테는 떳떳할 수 있겠군요. 10살이나 어린 신부라 얼마나 눈치를 받았는데요.”
“……당신도 참.”

그런 그들의 애정행각을 감격에 젖어 바라보던 시니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두 부부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테이블만 보던 예지가 다시금 움찔 하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아슈팔트는 황급히 클레어에게서 떨어지며 헛기침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사과하고 싶군.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말해도 좋네.”
“……아뇨, 딱히…….”
“아냐, 예지야.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봐. 선생님이 다 해줄게.”
“진짜로 없는데…….”
“걱정말고! 선생님 돈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슈팔트가 보기엔 도저히 18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듣고 있는 예지가 20살이란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구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꼭이다? 선생님이랑 약속한거야?”
“네에…….”

예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에 클레어는 빙긋 웃었습니다. 마치 확인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여전히 놓여있던 헤어 드라이어에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음. 헤어 드라이어를 만든 게 예지라고?”
“제, 제가 다 한건 아니고!”

허겁지겁 손을 휘젓던 예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그냥 조정만……원래는 과장님이…….”
“그래도 자네가 만든 것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네…….”

아슈팔트는 홍차에 다시 손을 뻗었습니다. 힉, 하는 예지의 숨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홍차잔을 집으니 완전히 식어버린 찻잔의 온도가 차가웠습니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서류뭉치를 테이블 위로 건넸습니다.

“헤어 드라이어의 개선점이네. 부디 자네가 읽어줬으면 좋겠군.”
“드라이기……그거, 혹시 사용해보셨나요?”
“네. 제가 매일 아침 마님의 머리 정돈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시니아가 부족해진 홍차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귀족끼리라면 발언할 기회가 없지만, 예지가 암만 봐도 작위를 가지진 않아보였습니다.

사실 그녀로서는 내심 예지를 깔보고 있기도 합니다. 어리버리한 모습도 그렇고, 예절도 뭣도 없는 그저 평민 나부랭이 아닌가요. 이래뵈도 시니아, 그녀는 나름 남작가의 차녀입니다.

그럼에도 시니아는 웃음을 띄었습니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의 오랜 지인이니 예의를 지켜야죠. 식어버린 예지의 찻잔에도 홍차를 따라주었습니다.

“덕분에 매일 아침 힘들지가 않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뇨, 아니에요……아, 고맙습니다.”

예지는 뜨거운 홍차를 받자마자 홀짝였습니다. 뜨거운지 인상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서류 뭉치를 집어 살펴봤습니다.

팔랑, 팔랑.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로 서류를 한참이나 보던 그녀는 그것을 무릎에 두고 헤어 드라이어를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뽀각, 하고 그것을 열었습니다.

안쪽에는 손톱만한 수정과 여러 기호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서류와 비교해가며 보던 예지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다시 한 번 헤어 드라이어를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헤어 드라이어를 위로 올려 무언가를 찾는 듯이 보였습니다.

서류도 뒤척여보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시니아를 바라봤습니다.

“저기……마선은 어디있나요?”
“마선이요?”
“네……그, 아마 이 정도 되는 걸텐데…….”

예지는 손을 자신의 어깨만큼 벌렸습니다. 시니아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습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만.”
“……네?”

예지는 눈을 껌뻑껌뻑이더니 되물었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썼어요?”
“그, 여기에 이렇게 마력을 넣어서…….”

시니아는 헤어 드라이어의 수정부에 손을 대고는 마력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응접실 안에 희미한 푸른 빛이 퍼져나갔습니다. 후웅, 하는 바람소리가 헤어 드라이어에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렇게요.”

그 모습을 보던 예지는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왠지 그 모습이 머쓱해진 시니아는 흘려보내던 마력을 멈추고 헤어 드라이어를 내려놓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예지는 입가에서 침이 흐를 뻔 한 걸 닦았습니다.

“뭘, 뭇, 어, 왜, 어?”
“……저기……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시니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예지는 그 손을 뒤집어서 살펴봤습니다. 굳은살이 드문드문 박힌 손이 부끄러워 얼른 손을 빼내니 예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혹시 출마도기나……?”
“네……?”

잠시만요,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예지는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잠시후, 그녀는 몸뚱이만한 장치를 수레로 밀며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복잡한 장치였습니다. 여기저기에 스크롤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마석들이 무지개빛으로 빛나며, 빨갛고 파란 단추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었습니다.

예지는 거기서 검은 선으로 보이는 것을 헤어 드라이어에 연결하고는 빨간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아까와 같은 바람소리가 헤어 드라이어에서 들려왔습니다. 그것도 잠시, 곧 가져온 장치에서 요란한 빛과 소음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에 그 방에 있던 모두는 귀를 틀어막아야 했습니다.

“꺄아아악!”
“예지야! 예지야!”
“그만! 이게 무슨 소리야!”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아슈팔트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조차 묻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지는 인상을 조금 찡그릴 뿐, 한참이나 장치와 헤어 드라이어를 바라보다가 단추를 눌렀습니다. 장치는 한참이나 비명소리같은 소음을 내다가 멈췄습니다.

“이게 원래 쓰는 방법인데요…….”
“…….”

귀가 얼얼한 세 사람은 작은 예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혹시 집에……하네스……없으세요……?”
“하……? 뭐……?”
“어……민간 주택 건설법에 따르면 최소한……방마다 하나씩은 있으셔야되는데……근데, 최근에 나온 법이라서……없으실수도…….”

예지는 깃펜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개선 사항이 써진 서류의 뒷면에 그림 하나를 그렸습니다. 커다란 동그라미와 그 안에 작은 동그라미 두 개가 나란히 그려졌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세 사람에게 보여줬습니다.

“이런 건데요…….”
“……아니, 본 적 없다만.”

아슈팔트는 아직도 멍멍한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클레어, 아니, 윤주는 저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콘센트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습니다.

“저거, 어디서 본건데?”

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거, 그 엘리야에서 봤어요. 전하, 그 왕도에 커다란 장신구점 있잖아요?”
“아하, 예물을 맞췄던 곳 말이군.”

아슈팔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확실히 엄청난 곳이었지. 한밤중인데도 대낮처럼 환하고, 겨울철인데도 장작을 어찌나 떼웠는지 한여름처럼 후덥지근 했어. 내온 음료수에는 값비싼 얼음을 얼마나 넣었는지 이가 시려울 정도였고.”
“엘리야, 요…….”

예지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지만, 원체 표정이 어두운 터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아무튼……이걸 쓰려면, 그, 하네스 라는 곳에, 이걸 꽂아서 써야 되는데요…….”
“진짜로 콘센트였구나?” 
“콘……?”

알 수 없는 단어에 아슈팔트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오늘만 해도 도대체 얼마나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지는 건가요. 그러나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클레어는 빙긋 웃었습니다.

“내가 나중에 말해줄게요, 애시. 아무튼. 그게 있어야 이 헤어 드라이어가 동작을 하는건데. 그렇지?”
“네, 네. 근데, 그, 저…….”
“시니아입니다.”
“아, 네. 시니아 씨……? 님……? 은 그걸 맨손으로 사용하셔서…….”
“그거라면 나도 사용한 적이 있다만.”

아슈팔트는 오기 전에 자신이 사용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시니아와 마찬가지로 헤어 드라이어를 작동시켰습니다. 

“자, 이렇게.”
“……그, 전하……그렇게 막 쓰시면…….”

우물쭈물하며 예지가 말리려고 할 때, 헤어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바람이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응? 이, 이게 왜……?”
“어, 얼른 내려놔주세요, 전하……!”

아슈팔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있던 팔이 덜덜 떨리자 그는 그것을 탁자에 뿌리치듯 내려놓았습니다.

“괘, 괜찮으세요……?”
“애시, 괜찮아요?”
“전하! 세상에!”

픽 하고 그는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것을 받치듯 클레어가 두 손으로 어깨를 잡았고, 시니아가 손부채질을 해줬습니다.

“……아까는 잘만 됐는데……?”
“잠깐이라면 괜찮으실 수는 있어요……그리고 평소에 단련도 하셨고…….”

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헤어 드라이어를 집어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어, 이쪽에 보이시는 게 발열 마도에요. 그리고, 이쪽이 송풍 마석인데, 그리고 어……이게 보호 마력로고…….”
“……결론만 말해주게.” 

파랗게 된 안색으로 아슈팔트는 클레어의 어깨에 기댄 채 손을 내저었습니다. 예지는 허겁지겁 손가락으로 접어가며 무언가를 암산하고는 말했습니다.

“어, 어, 마력 송출량은……성검이랑 비슷할거에요…….”

방 안에 침묵이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한 순간, 시니아에게로 향했습니다.

시니아는 두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된거죠…….”
“……그러게요오…….”

Posted by B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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