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가시요?”
“그래, 생선가시 말이야.”

점심을 살짝 지나가는 시간. 식사도 했겠다, 꾸벅꾸벅 졸던 나는 옆에서 들려온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잠에서 깨어버렸다. 옆을 바라보니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 여성이 의자에 앉은 채 앞에 서있는 난장이를 보고 있었다. 쫑긋거리는 길다란 엘프 특유의 귀가 그녀의 감정을 여실없이 드러내고 있다.

“갑자기 무슨 생선얘기에요?”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러자 풍채 좋은 중년의 남성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 박희성 사원. 마침 잘됐어. 그래, 생선가시가 문제야.”
“그쵸. 고등어는 가시가 좀 많죠. 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 보네요.”

하품을 쩌억 하며 오늘 점심으로 나온 고등어 자반을 생각해봤다. 음, 고등어 맛있지. 여기나 저기나 가시 떼기가 귀찮은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드로민 부장이 한껏 자란 턱수염을 쓸으며 웃음을 터뜨리신다. 한편 내가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버릇없이 보였는지 귀를 날카롭게 세우며 에이다 대리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슬며시 눈을 피하는 척 노트와 펜을 준비했다.
드로민 부장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뒤에 있던 의자에 털퍽, 앉았다. 끼긱 하며 의자가 꺾이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다.

“그래, 아무튼 생선가시란 말이지. 이번에 사실 ‘생선가시 제거 마법’쪽으로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응? 그런 것도 만들었나요?”

내가 눈을 껌뻑거리며 에이다 대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드로민 부장 역시 히죽 웃으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끼긱, 끼긱. 조만간 의자를 바꿀 때가 올 것 같다.

“희성 씨, 아키나 공국과 나르카 왕국이 전쟁중인 건 알고 있겠지?” 
“아, 네. 교육 때 듣긴 했죠.”
“좋군. 얘기가 빠르겠어. 전쟁이 지속되면서 사실 자재 수급이 제대로 되질 않는 모양이더군.”
“생선 쪽이 말인가요?”
“아니, ‘흰색 대리석’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부장과 대리 사이엔 조금 더 긴 침묵이 오갔다. 서로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에이다 대리가 앗, 하며 내게 물었다.

“혹시 ‘흰색 대리석’이 뭔지 모를……수 있겠다.”
“가끔 보면 두분이 절 놀리는 것 같을 때도 있어요.”
“놀리는 때도 있긴 한데. 아무튼.”

내가 눈빛으로 항의를 하거나 말거나, 에이다 대리는 설명을 이어갔다.

“기본적으로 ‘생선가시를 제거하는 마법’과 같이 물체 안의 다른 물체를 제거하는 마법은 물의 마나를 사용해. 근데 이 물의 마나를 쓰는 주요 매개체가 대리석이고, 그중에서도 ‘흰색 대리석’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거든. 문제는 이 흰색 대리석의 공급이 막혀버린거지. ‘흰색 대리석’의 최대 매립지인 아키나 공국이 전쟁중이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사실상 ‘생선가시를 제거하는 마법’의 공급이 막혀버린거야. 이야, 난 살다살다 고등어에 그렇게 가시가 많을 줄 몰랐는데.”

호오, 그렇군, 그렇군.
정말 하나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대리석이 어쩌고, 뭐 어쨌단거야.

“그래서, 그 대리석이 안나와서 생선가시를 못뽑아낸다구요?”
“바로 그렇지!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이 ‘생선가시를 제거하는 마법’을 개발하기로 했단거지!”

그렇게 말하며 드로민 부장이 허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삐걱거리는 의자소리가 사무실을 한가득 채웠다. 

“대리석 없이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꾹 깨무는 에이다 대리의 표정이 어쩐지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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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말하는 소설 장르 중에 이세계물이라는 게 있다. 마법인지 스킬인지 모를 뭔가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휘둘러지는 이세계에 평범한 주인공이 희대의 사기적인 방법으로 영웅이 된다는 내용이다.
나 역시 그런 소설들을 좋아하던 평범한 직장인 중 하나였으며, 일하는 짬짬히 읽으며 그런 세상을 꿈꾸고는 했다.

어느날 클리셰처럼 트럭에 치였을 때, 그리고 대뜸 사무실 천장에서 뚝 떨어졌을 때만 해도 난 내가 꿈꾸는 세상에 들어온 줄 알고 내심 설레하고 있었다. 엘프도 있었고, 드워프도 있었고, 수인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에 낭만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세계 난민 교육 센터’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명을 듣다보면 이세계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모험이랄 것도 없고, 사교계는 내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으며, 마법은 주문만 외우면 불이 튀어나오는 그런 것과는 너무 달랐다.
즉, 내가 생각하던 이세계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내가 떨어진 곳에는 난민 지원이 꽤나 체계적으로 짜여져있어 이런저런 보조금이나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만약에 한창 전쟁중인 국가로 떨어졌다면 최전방으로 끌려갔을테니까.
약 3개월의 속성교육을 받은 후, 나는 ‘러우스 상회’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번에 상회에서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 마법 스크롤 개발 부서를 만들었는데, 마침 그곳에 내가 지원서를 낸 것이다.
아마 날 채용하면서 받을 지원금이 목적이었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했다. 비록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실습도 하고 공부도 해가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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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힘들다.”

회사 뒷문의 우거진 나무 밑. 
긴 담뱃대를 꺼내며 에이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색의 나뭇잎을 욱여넣으며 궁시렁 거리더니 내게 나무로 된 담배갑을 내밀었다.

“하나 끝내면 또 하나 가져오고. 그것도 뭘 자꾸 이상한 것만 물어 와. 그치?”

담배갑에서 연초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을 때 상사가 동의를 표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만으로 대답이 되는 법이다.

“빨리 희성 씨가 1인분은 해 줘야 내가 편할텐데. 공부는 좀 어때?”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잘 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네요.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어요.”
“일단 꾸준히 해 둬. 내가 다~밟아 온 길이니라.”

에이다는 키득키득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아까 챙겨온 손바닥만한 양피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말았다. 손가락 마디만한 양피지의 겉부분에는 손톱만한 푸른색 수정이 박혀 있었다.
에이다는 그걸 받아 수정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렸다. 

“뭐 막히고 그런 건 없지? 아직 기초적인 거라서. 한번 볼까?”

그녀의 손톱이 닿을 때 마다 창백한 불빛이 수정 안쪽에서 퍼져나갔다. 몇 번 두드리자 이윽고 수정에서 뻗어나가던 푸른 불빛이 양피지의 안쪽에서 무언가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말린 양피지의 위로 성냥불만한 불꽃이 화륵, 타올랐다. 수정과 마찬가지로 푸른색을 발하는 불꽃이었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만든 마법 스크롤, ‘작은 불을 켜는 마법’이다.

에이다는 내가 만든 스크롤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푸른 불꽃은 나뭇잎을 파스스, 태우더니 이윽고 흰색의 연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뱃대를 한번 깊게 빨아들인 그녀는 후우-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나뭇잎과 같은 자주색의 연기였다.
그녀는 스크롤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방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불이 붙어있는 스크롤을 내게로 내밀었다.

“응, 좋네. 마력도 안정적이고. 붙여줄까?”
“감사합니다.”

내가 스크롤에 담배를 가까이 하자마자 화륵, 하고 담배끝이 빨갛게 타올랐다. 한번 깊게 빨아들이니 향긋한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마치 숲속을 걸을 때의 상쾌하고도 시원한 냄새였다. 

“어……? 우와……?”

내가 멍하니 있자 에이다가 키득키득 웃으며 담배갑을 꺼내들었다.

“신기하지? ‘마력에 반응해서 맛이 달라지는 마법’을 담은 담배. 이런 건 원래 세계에 없지?”
“깨물면 맛이 바뀌는 담배는 있죠.”
“그건 좀 신기한데. 나중에 건의해볼까.”

후우, 하고 자주색 연기를 내뿜은 에이다는 다시 스크롤의 수정을 톡톡 건드렸다.

“잉?”

톡톡, 톡톡, 톡톡톡톡톡톡. 
한참이나 수정을 두드리던 그녀는 스크롤을 내게 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성 씨. 이거 안꺼지는데?”
“……아. 까먹었다.”

화륵, 화륵. 스크롤 위로는 파란 불꽃이 남실남실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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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선과 악이 존재했다.

“각오해라, 마왕 루시페리온!”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마족에게 덤비느냐! 용사 강진호!”

언제나 악이란 존재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선이 존재했다. 

“크읏, 이세리! 감히 네놈이 우리를 배신하고 용사에게 붙었단 말이냐!”
“흥,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원래부터 인간의 편이었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네 밑으로 들어간 척 한거지!”

그러나 항상 선은 나약했으며, 악은 무자비한 그 힘을 휘두르기 마련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라! 스크롤 해방! [ 불꽃덩이 ]!”
“그까짓 나약한 마력이 깃든 스크롤 따위로 날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

선은 그렇기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선을 찾아왔고, 그 이어진 선들은 결국 악을 무찌르기 마련이었다.

“우읏?! 이, 이 힘은 뭐냐! 이런 나약한 마력 따위로 감히, 감히!!”
“잘 알아둬라, 루시페리온! 이것이 인간의 선한 의지임을!”
“이 마계의 지배자 루시페리온이!! 인간주제에!!”
“이야아아아앗!!”



……물론.

“허. 저거 생각보다 괜찮네요.”
“난 항상 이 순간이 너무 좋아. 내가 만든 게 잘 굴러가는 거 보면 참 마음 뿌듯하단 말이야? 이야, 잘탄다!”

누군가는 그 선에 정당한 대가를 매겼고.

“그래서. 저거 팔릴 거 같아요? [ 불꽃덩이 ]?”
“어…….”

대가는 정당한 금전이었으며.

“안 팔리지.”
“그쵸? 저건 너무 세네. 출력 조절을 좀 할까요? 오메, 용사 불붙었다!”
“뭐? 이런 씨, 오. 역시 용사는 다르네. 저걸 튕겨내? 어, 단계별로 나누는 건?”

정당한 금전은.

“그거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건데요.”
“아, 그랬지. 쟤들이 안한다고 했었지.”

정당하게 우리 뱃속으로 들어오기 마련이었으니.

“하여튼 우리 윗분들은 대가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그래서 이거 안된다고 했죠. 그리고 불꽃덩이가 뭐야, 불꽃덩이가.”

우리는 장사꾼.
선을 팔아 지갑을 채우는 개발자 나부랭이.
악을 묻어 저녁밥을 사먹는 위선자 나부랭이.

“아 그건 과장님한테 얘기하라고. 세린 과장님이 지었잖아.”
“그러니까 대리님한테 말씀드리는 건데요. 말씀 좀 해달라고.”

많이들 사가세요, 많이들 사가세요. 
우리는 마법개발부.

“너 요즘 개긴다?”
“개기긴 뭘요. 담배나 하나 좀 주세요. 오, 저기 끝나간다.”
“벌써? 화력 죽이네. 희성아, 가스레인지? 그거 저걸로 좀 개발은 안돼?”

많이들 팔아주세요, 많이들 팔아주세요. 
우리는 마법개발부.

“냄비 태우면 또 출장인데요. 안그래도 어제, 아, 온다.”
“아 뭔 벌써. 이야, 고생하셨습니다~! 용사님들 덕분에 또 다시 세계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에이다 대리님! 정말 대단한 스크롤이었습니다! 덕분에 루시페리온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과, 약간의 동전만 들고오세요. 뭐든지 만들어드립니다.

“아뇨 아뇨, 별 말씀을~!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야 이 한몸 아깝지 않죠!”
“하하하! 역시 러우스의 스크롤은 믿을 수 있군 그래!”
“왕실 마법사이신 데리안 공작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신다면야 너무 영광이죠~. 다음에도 또 이용해주시면 더 영광이구요~.”

그러니 부디.

“그런데 말이야.”
“네?”

클레임만은 말아주세요.

“이 [ 불꽃덩이 ]란 스크롤, 참 성능은 좋은데 말이지. 쓰기에는 너무 화력이 센 것 같군.”
“아, 확실히. 하마터면 저도 휘말릴 뻔 했으니까 말이죠. 그런 것에 대한 안전대책이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그런 건 미리 말해주세요.

“이거 수정 되죠?”

우리도 힘들어요.

“……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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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포 일 러 주 의 !

※ 본 팬픽은 네이버 시리즈에서 활동하시는 월하야담 님의 '귀령'을 바탕으로 한 팬픽입니다.

해당 소설의 결말, 또는 전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령' 2부의 결말을 읽지 않았거나, 해당 소설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본 팬픽을 읽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 *

납골당에서 나온 건우는 흡연실을 찾아 들어갔다. 흡연실 안에는 환풍기가 작동하지 않는지 매캐한 담배연기들이 자욱하게 쌓여있었다. 빈속에 숨을 쉴 때 마다 담배연기가 쌓이니 또다시 구역질이 치솟았다.

"큭……!"

쓰라린 위액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불쾌했다. 간신히 참아낸 건우는 가래와 함께 쓴물을 뱉어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옆에서 불쑥, 하고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옆을 보니 중년의 여성이 건우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물병 하나가 손에 들려져 있었다.

"아, 아뇨……그……."
"괜찮으니까 드세요. 많이 힘드시죠?"

어서 받으라는 듯이 페트병을 흔드는 여성에게서 물병을 받았다. 방금 막 구매했는지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 위에 시리도록 느껴졌다. 잠시 물병을 바라보던 건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 어머님도……."
"저는 저희 어머니 49재셔서요."
"아, 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건우에게 손을 내저으며 여성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것에 화답하듯 건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감사합니다."

건우는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차가운 물을 마셨다. 빈 속이 찬물로 채워지는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여성은 페트병을 비워가는 건우를 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ㅡ치익, 치익. 스읍, 후.

짙은 담배연기 한줄기가 흡연실을 메웠다. 건우 역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뒤적거렸다.

"……잃으신 지 얼마 안됐나봐요."

담배를 찾던 건우는 멈추고 여성을 쳐다봤다. 여성은 안쓰러운 눈으로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잡았던 담배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부모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리고……."

건우는 처연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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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실 옆의 공원 벤치. 둘은 통성명을 했다.

여성의 이름은 이주연. 고등학생 아들을 둔 그녀는 혼자 어머니의 49재를 위해 찾아왔다가 너무 괴로워하고 있어 보이는 건우를 보고는 아들 생각이 나 그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그런데 남편분이나 자녀분들은……."
"저 혼자 왔어요. 애가 수능이 코앞이라서."

아직 4월이건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주연의 말에 건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할 시기니까요. 일분일초도 맘대로 쓸 수 없죠."
"……네."
"그럼 건우 씨는……."

조심스럽지만 그의 사연이 궁금하다는 시선. 남들이 보기에는 실례가 아닐까 하지만 어째선지 건우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털어놓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야.

"……그, 결혼……하려고 했었던 사람입니다……."
"아……."

첫마디를 떼는 것이 어려웠을까.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에 대한 건 말하지 못하다보니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주연은 별로 개의치 않다는 듯이 따로 물어보는 낌새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본인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머나'라던가, '세상에'라던가, '어쩜 어쩜'이라던가. 수많은 추임새를 넣어가며 이야기를 듣던 주연은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어느새 축축해진 손수건을 곱게 접어 핸드백에 넣은 주연은 건우의 두 손을 꽈악 잡았다.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밥도 안드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입맛도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앞에 가서 국밥이라도 꼭 드셔야돼요."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건우를 보던 주연은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애들 점심시간이라."
"아닙니다. 마음만으로도 제가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꼭 드셔야돼요!"

그렇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 주연은 공원길을 걸어나갔다. 건우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흡연실로 다시 들어왔다.

주머니에 구겨져있던 담배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를 찾았다.

"남편 분 하시는 사업 잘 되시고……. 아드님도 좋은 대학 가시고……. 손녀는 이른 시기에 보니까 너무 아드님한테 화내지는 마시고……."

오랜만에 대화를 해본 탓인지 조금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장님네 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사람과 대화를 한 것 만으로도 어쩐지 조금은 기운이 났다.

저 멀리엔 여전히 주연이 오솔길을 걸어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라이터를 찾은 건우는 담배에 불을ㅡ.

"……어?"

ㅡ붙일 수 없었다.

방금 뭐였지? 건우는 담배를 떨어뜨리고는 입을 가렸다. 그러나 한번 움직인 입술은 멈출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자신의 힘으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틀어막은 손의 틈새 사이로 무언가가ㅡ.

"무, 무, 무병장수 하니 조상님 덕이요……만사가 형통하니 쌓아온 덕이요……지금처럼만 지내면……대대손손……!"

그는 흡연실을 뛰쳐나와 공원의 오솔길을 따라 뛰어갔다. 저 멀리엔 여전히 주연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수다를 떠는 주연의 몸이 뒤로 돌며 건우를 쳐다봤다. 놀란 듯 커다래진 눈동자가 건우의 눈에 들어왔다.

"거, 건우 씨?!"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소리를 지르며 놀란 것은 오히려 도건우였다. 꼴사납게 주연의 앞에 넘어진 건우는 덜덜 떨면서 주연을 바라봤다.

아니, 주연이 아니다.

"아, 아, 아……!"

놀란 채 굳어버린 주연의 바로 뒤에, 두 노인이 손을 맞잡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어쩐지 주연과 닮았다.

아니, 주연이 저 둘을 닮은 것이다.

"저, 저기……괜찮아요?"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주연. 그리고 그에 맞춰 한 걸음씩 다가오는 두 노부부.

인자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인자함은 공포로 다가올 뿐이었다.

"오, 오지마!"

건우는 주연을 지나쳐 도망치듯이 납골당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눈에 띄는 하얀 트럭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끼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고 그는 납골당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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